구찌의 플로라 스네이크 실크 스카프.구찌의 창립자인 구치오 구치는 1929년 어느날 열일곱 살이던 막내아들 로돌프 구치를 로마로 보냈다. 중요한 고객에게 물건을 전하라고 심부름시킨 것이다. 그런데 로마 플라자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친 영화감독 마리오 카메리니 감독이 미남인 로돌프에게 스크린 테스트를 받으라고 제안했다. 로돌프는 이에 응했고 영화배우가 됐다. 로돌프는 마우리치오 단코라라는 예명으로 카메리니 감독의 ‘철로’ 작품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초기 이탈리아 영화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이후 찍은 영화들은 ‘철로’ 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 로돌프는 같은 영화에 출연한 신인 배우와 1944년 베네치아에서 낭만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1948년 9월 26일 로돌프의 아들 마우리치오 구치가 태어났다. 마우리치오는 훗날 전 부인 파트리아지아 레지아니에게 살해되는 비극적인 일화를 낳기도 했고 가족 기업인 구찌를 바레인 소재 투자펀드인 인베스트코프에 매각해 가족의 그룹 관여를 종식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로돌프는 당초 가업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변화의 계기가 찾아왔다. 그가 영화계에서 경력을 쌓아 가던 1935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사건으로 구찌는 큰 타격을 입었다. 국제연맹이 이탈리아에 금수 조치를 내리면서다.
1950년대 구찌 핸드백, ‘세련된 스타일’ 대명사로 떠올라
52개국이 이탈리아 제품 판매와 소재 공급을 거부하면서 창립자 구치오는 고가의 여행 가방 제작에 필요한 고급 가죽과 소재들을 구할 수 없었다. 구치오는 자신이 일으킨 사업체가 몇 년 전 도산한 아버지의 밀짚모자 회사와 비슷한 운명을 맞지 않을까 두려웠다. 다른 방도를 찾았다. 이탈리아 군대에 납품할 군화를 만들 공장을 세운 것이다. 당시 이웃이던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금수 조치 기간에 가장 훌륭한 구두를 생산하고 있었다. 코르크·라피아·야자나무·사탕 포장용 셀로판지 등을 사용해 구두를 만들었다.
구찌의 창립자 막내 아들인 로돌프 구치. 그는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구찌 가족은 산타 크로체의 무두질 공장에서 생산한 쿼이오그라소(윤할유로 처리한 무광 가죽)를 비롯해 이탈리아 내에서 가능한 많은 가죽을 구했다. 특수하게 사육된 송아지로부터 얻었다. 긁힘을 방지하기 위해 외양간에서만 먹이를 먹일 정도로 정성을 쏟은 송아지의 가죽을 건조한 다음 물고기 가시에서 빼낸 윤활유로 처리 작업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가죽은 부드럽고 매끄러운데다 탄력도 뛰어났다. 손가락으로 쓰다듬기만 해도 흠집이 기적처럼 사라질 정도였다.
로돌프는 배우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이탈리아 영화업계는 급격하게 변화를 겪었다. 유성 영화가 무성 영화를 대체하면서 로베르토 로셀리니, 루키노 비스콘티 등 네오리얼리즘 감독들은 이전의 도식화된 배우를 원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로돌프에게 중요한 배역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부인의 권유에 따라 가업에 복귀했다. 처음부터 가족 경영을 주장해 온 창업자의 첫째 아들인 알도는 아버지에게 로돌프의 복귀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구치오는 일단 로돌프를 파리오네 매장으로 보냈다. 미남인 로돌프는 일을 시작하자마자 매장을 찾은 여성 고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고객들은 로돌프처럼 예의 바르고 잘생긴 판매원이 구찌 매장에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알도의 로마 매장도 큰 성공을 거뒀다. 종전 후 로마에 주둔한 미군과 영국군이 가죽 가방과 벨트, 지갑 같은 기념품에 안성맞춤인 구찌의 수공예 제품을 많이 구매했기 때문이다. 구찌는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모든 장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방의 완성을 도맡았고 가방마다 담당 장인의 식별 번호를 넣었다. 결함이 나오면 누가 만든 제품인지 알수 있었다.
1950년대 초반이 되자 구찌 핸드백과 여행용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스타일이 세련됐다는 인식이 퍼졌다. 영국 여왕에 곧 오를 엘리자베스 공주도 피렌체의 구찌 매장을 방문했다. 그뿐만 아니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케네디 대통령과 결혼하게 되는 재클린 부비에(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등도 매장을 찾았다. 할리우드 스타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그레이스 켈리, 로돌프가 영화배우 시절 친분을 쌓았던 베티 데이비스, 캐서린 헵번, 소피아 로렌, 안나 마냐니 등도 구찌의 단골손님이 됐다.
1966년 로돌프는 이탈리아 화가 비토리오 아코르네로의 도움을 받아 구찌의 상징 중 하나가 된 플로라(Flora) 스카프를 제작했다.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어느날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가 밀라노 매장을 방문했다. 로돌포는 왕비를 맞이했고 매장 곳곳을 안내했다. 로돌프는 선물을 골라 보라고 권했다. 계속 사양하던 왕비는 로돌프의 거듭된 권유에 “정 그러면 스카프는 어떨까요”라고 했다.
우연한 기회에 그레이스 켈리 위한 플로라 스카프 제작
그레이스 왕비는 구찌가 폭 70cm 안팎의 작은 정사각형 몇 종류 이외에는 스카프를 거의 제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나마 취급하던 스카프는 왕비에게 어울리지 않는 열차나 아프리카 원주민 문양이 들어가 있었다. 로돌프는 시간을 벌기 위해 어떤 스카프를 원하는지 물었다. “글쎄요…. 꽃무늬 스카프가 어떨까요”라고 했다. 난감한 로돌프는 재치있게 재빨리 대응했다. 그는 미소를 띄우며 이렇게 말했다. “왕비 전하, 마침 우리가 개발 중인 스카프가 딱 그런 종류입니다. 완성되는 대로 왕비 전하가 처음으로 받을 수 있도록 전해 드리겠습니다.”
플로라 패턴의 블라우스(사진 출처: vogue.co.kr)이런 연유로 화가 비토리오 아코르네로는 화려한 꽃이 넘쳐나는 플로라 스카프를 디자인하게 됐다. 당시 시도한 플로라 디자인은 구찌 실크 제품의 확장을 이끌었고 이후 의류·가방·액세서리는 물론 장신구에까지 응용됐다.
니먼 마커스 백화점 부사장이자 패션 총괄 책임자로 일한 패션 유통업계의 권위자 존 케이너는 이렇게 회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자 이탈리아는 수공예 가죽 구두와 핸드백, 섬세한 금장신구를 비롯한 품질 좋은 고급 제품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구찌는 유럽 최초의 신분 과시용 브랜드 중 하나였어요. 전쟁으로 오랫동안 좋은 물건을 소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제력과 신분을 마음껏 과시하고 싶어했죠. 내가 구찌라는 브랜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어요. 당시 사람들은 구찌 제품은 가격에 맞는 품질을 제공한다고 생각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