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K기업은행(이하 기업은행)이 달라졌다. 중후장대 제조업 지원에서 벗어나 신기술 벤처 투자에도 힘주고 있다. 통상 부행장들이 퇴임하면 맡았던 자회사 수장 자리에 전문 인력들이 대거 등용돼 핸들을 잡고 있다. 국책 은행으로서 중소‧벤처기업 성장의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하는 동시에 수익성도 추구하겠다는 포석이다.
환골탈태의 중심엔 지난해 1월 취임한 윤종원 행장이 있다. 윤 행장은 국제통화기금(IMF)·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와 대통령 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거친 경제 전문가다. 그는 10년간 굳건했던 내부 승계 전통을 깨고 탄생한 외부 출신 행장이라 선임 초기 낙하산 논란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1년 반이 지난 지금 윤 행장은 기업은행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능력 위주의 인사를 단행하고 내부 갈등을 봉합하며 단계적으로 조직을 개편하는 등 실용성을 추구한 경영이 주효했다.
성과는 숫자로 나타났다. 기업은행은 올해 상반기 순이익이 1조원을 넘었다. 사상 최대 실적이다. IBK캐피탈·IBK투자증권 등 주요 자회사도 일제히 큰 폭의 실적 성장세를 보였다. 기업은행이 모험 자본 투자를 통해 기업공개(IPO)에 성공한 기업 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악재 속에서도 2019년 3개에서 지난해 10개로 늘었다. 지난해 IPO 기업이 총 70개인 점을 고려하면 괄목할 만한 성적표인 셈이다. 모험 자본 투자는 신생 기업으로선 든든한 자금조달처를 확보할 수 있는 한 방법이다. 이 기업이 IPO에 성공하면 기업은행은 투자 수익을 거둘 수 있다.
인사 키워드, 전문성‧공정
‘인사가 만사’라는 말처럼 모든 전략에 인사만큼 중요한 게 없다. 윤 행장은 인사 키워드로 ‘전문성’과 ‘공정’을 내걸었다. 취임 후 단행한 첫 인사에서 영업 전선에 있던 ‘현장통’ 인물들을 부행장급으로 뽑았다. 다만 내부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임기를 채운 4명의 부행장만 교체했다.
주목할 점은 자회사 인사였다. 윤 행장은 자회사 인사에 ‘전문성’을 우선하는 인사 철학을 고스란이 담았다. 대표적인 예가 IBK투자증권 수장에 서병기 대표를 ‘공모’ 형식으로 낙점했다는 점이다. 서 대표는 한국투자공사(KIC) 창립 멤버이자 신영증권 부사장 출신의 투자은행(IB) 전문가다. 은행 부행장이 퇴임하면 자회사 최고경영자(CEO)로 자리를 옮기는 관행을 깨고 외부에서 자본 시장 전문가를 수혈한 것이다.
그 결과 IBK투자증권은 지난해 연결기준 영업이익 1160억원과 당기순이익 837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2019년과 비교해 각각 31.5%, 32.5% 증가한 수준으로 역대 최대 실적이다. 올해 상반기엔 전년 동기 대비 43.1% 증가한 485억원의 이익을 냈다.
IBK캐피탈엔 자타 공인 IBK 최고 기업 금융 전문가로 불리는 최현숙 대표를 중용했다. 취임 후 최 대표는 모회사인 기업은행의 강점을 살려 모험 자본과 기업 금융 분야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체질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IBK캐피탈의 상반기 순이익은 129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97.2% 급증했다.
자회사들의 성장세로 기업은행의 올 상반기 연결 기준 순이익(1조2143억원) 중 비은행이 차지하는 비율이 24.82%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문성을 강조한 외부 인사 영입은 은행 내부에서도 볼 수 있다. 기업은행은 지난해 11월 홍보·브랜드본부장에 조민정 전 현대카드 상무를, 올해 신설된 직원권익보호관에 이현주 전 한국인성컨설팅 이사를 선임했다.
올해 들어선 성과와 역량이 검증된 여성 인력에 대한 승진 기회를 확대했다. 하반기 정기 인사에 여성 지점장으로 역대 최대인 24명을 승진시켰다. 상반기 지점장 인사로 여성이 23명 승진한 것을 고려하면 올해에만 47명이 지점장으로 올라선 것이다. 보수적인 은행권 인사에서 ‘여풍(女風)’을 주도하는 기업은행의 모습은 윤 행장이 강조하는 ‘공정’ 철학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능력 있는 여성들이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중이 담긴 것이다.
조직 개편해 중소 벤처에 투자 확대
내부 안정을 마무리한 윤 행장은 지난해 하반기 ‘혁신 금융’을 내세운 조직 개편의 승부수를 던졌다. 혁신 금융은 전통 제조업 중심으로 이뤄졌던 금융 지원 방식을 산업 변화에 맞춰 재편하겠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이를 위해 윤 행장은 중소·벤처기업을 지원하는 ‘혁신금융그룹’을 신설했다. 또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간 1조5000억원의 모험 자본(직접·간접) 공급 계획도 수립했다. 단순 은행 업무로는 더 이상 부가 가치를 창출하기 어렵다고 판단, 혁신 산업과 기업을 먼저 발굴해 투자·지원하는 ‘모험 자본 전문 은행’으로 탈바꿈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기업은행은 창업 기업이나 성장 초기 기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한다고 밝혔지만 사업 추진에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본격적으로 모험 자본을 확대하고 중소·벤처기업에 대출을 확대한 것은 윤 행장 때부터다. 실제로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년간 약 8000억원의 모험 자본을 투자했는데 윤 행장은 취임한 지 1년 반 만에 약 6000억원의 모험 자본을 공급했다. 한국 중소기업 대출 시장점유율(올해 상반기) 역시 23.1%까지 올라서 역대 최고 수준을 나타냈다. 거래 중소기업 수도 200만 개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전체 중소기업이 360만 개인 것을 고려하면, 이중 절반 이상이 기업은행과 거래하는 셈이다.
금융권의 화두인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쟁력 확보에 대한 의지도 보였다. 윤 행장은 이사회 아래 ESG위원회를 신설하고 여성 이사를 전면에 내세우는 등 지속 가능 경영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특히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위원회 수장에 은행 내 2인자인 전무이사가 아닌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했다는 점에서 ESG 경영 강화의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풀이된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지난해 평가에서 기업은행은 ESG 종합 등급 ‘B+’를 기록했다. KB‧신한‧하나 등 주요 시중 은행은 ‘A’ 이상 점수를 받았다.
디지털 전환에 대해선 올해 3월 ‘디지털혁신위원회’를 구축하고 윤 행장이 직접 지휘봉을 잡았다. 고객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금융소비자보호그룹도 행장 직속으로 마련했다.
신뢰 흔드는 디스커버리 펀드 사태, 해결 시급
윤종원 IBK기업은행장이 취임 이후 금융 소비자 보호 강화에 강력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만큼 디스커버리 펀드 사태 해결이 하반기 풀어야할 주요 과제로 꼽힌다.
디스커버리 사모펀드 상품은 2017~2019년 은행권과 증권사에서 판매됐다. IBK기업은행(이하 기업은행)은 하나은행 등과 함께 디스커버리자산운용의 펀드를 판매했는데 펀드 운용사의 법정 관리 등으로 2500억원의 환매 연기 사태가 발생했다. 금융감독원의 분쟁 조정 결과 기업은행은 일부 투자자들에게 원금 손실 위험 등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판매한 것으로 드러났고, 기업은행이 투자자들에게 투자 원금의 40~80%를 손해 배상하게 됐다. 기업은행 이사회는 분쟁 조정안을 수용했지만 일부 투자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펀드에 투자한 원금 전액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윤 행장은 이 펀드가 판매되고 한참 뒤 행장에 선임됐기 때문에 직접적 연관이 없다”면서도 “최근 상품 판매 당시 다른 곳에서 취급하지 않는 위험 상품이란 사실을 알고도 기업은행이 판매를 결정했다는 정황이 나온 만큼 소비자 신뢰 회복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