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듯한 말과 글로 포장된 거짓 보고에 휘둘리기 십상…직접 만나 이해관계를 뚫어 보고 속내를 읽어야
최고경영자(CEO)에게 보고되는 문서에는 온갖 숨은 사연들이 담겨 있다. ‘견조한 안정세’와 ‘부진한 성장’이 사실 같은 말이듯이 단어 하나에도 신묘한 꼼수가 숨어있고 살아남기 위해 서로 입을 맞추는 월급쟁이들의 사내 정치가 스며든다. 그럴듯한 해외 사례와 통계로 포장해 주고 외신 보도로 지원 사격까지 해주는 전문가들도 가세한다.
문서 더미를 들고 골방에서 밑줄 그어 가며 외우는 경영자는 이렇게 꾸며진 거짓말에 바보가 된다. 파워포인트에 영상이 더해진 연출된 토론까지 나오면 사업 현장의 투박한 호소는 설 자리가 없다. 창업자나 전문경영인이나 다들 의심과 욕심으로 아수라장을 헤쳐 온 사람들인데 왜 이런 바보가 될까. 그 원인과 해결책을 생각해 보자.
듣고 싶은 말에 끌리다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자기가 잘 안다고 생각하면 위험 경고가 무식한 소리로만 들린다. 하다가 안 되면 세상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안 하고 열 받아서 더 질러본다. 심리학자들이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의사 결정’을 반박하며 수십 년간 증명해 온 내용들이다.
CEO도 이런 인간의 본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치열하게 더 생각하고 겸허하게 다른 의견도 물어보면 될 일이지만 불행히도 치열한 고민은 피곤한 일이고 똘똘 뭉친 이해관계로 들이대는 영악한 사람들 앞에 그냥 ‘좋은 뜻’으로 바른말 하는 사람들은 밀려나기 딱 좋다.
A 회장은 최근 회사 자금 사용으로 기소돼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개인적으로 억울한 면도 있지만 실정법으론 그에게 불리한 부분이 있다. 그 무엇보다 ‘재벌의 비리’라는 시선이 부담 요인이다. 평소엔 냉철한 A 회장이지만 형사 사건과 법조계의 속내가 익숙하지 않은 데다 억울함과 불안감에 시달려 전투력이 떨어진다.
그런데 회사 법무 라인은 ‘실형 가능성’은 고사하고 ‘유죄’ 언급도 안 한다. 맡은 일을 잘 못했다는 자백이 되니까 그렇다.
고액의 수임료를 받은 로펌도 속사정이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다. 담당 파트너 변호사는 솔직하게 실형 가능성을 얘기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무죄를 받아 줄 수 있다”고 나서는 변호사는 얼마든지 있다. 어차피 늘 있는 일도 아니고 세상일은 알 수 없으니 어떻게 보면 이런 낙관론을 주장한다고 나중에 책임질 일도 없다.
무죄를 바라는 A 회장이 이런 유혹에 솔깃해 실형을 얘기하는 로펌을 교체할 수도 있으니 낌새를 알아챈 로펌 대표는 정직하고 눈치 없는 파트너 변호사를 빼고 다른 인원들을 투입한다.
이렇게 되면 사건을 다루는 법무 라인과 변호인단 그 누구도 A 회장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는다. A 회장이 이런 이해관계의 속사정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 결국 듣기 좋은 말에 취해 안심하다가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실형을 받게 된다.
이 상황에서 A 회장은 로펌 변호사들 중 자기편이 될 수 있는 인재를 따로 찾아 소송의 속사정을 파악하고 ‘짜고 들이대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가려내야 한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할 수 있는 면허증을 미리 줘 별도의 라인으로 사건을 알아보는 방법도 가능한데, 사심 없이 조언해 줄 측근이나 지인들을 사업적 이해관계와 분리해 두려면 더욱 큰 능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남한산성 패러독스CEO에게는 온갖 그럴듯한 사업 계획이 몰려든다.
돈과 힘을 가진 사람의 숙명이자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그 좋은 사업을 왜 자기가 안 하고 내게 가져오나”라는 생각도 든다. 그럴듯한 프로젝트들을 보면 돈과 사업 기반은 회사가 대고 막상 실익은 다른 사람들이 챙기는 경우도 있다.
중국 무역으로 큰돈을 번 B 사장은 과거의 인연으로 유흥업계에도 간여하고 있다. B 사장 수하의 K 전무는 B 사장에게 도박장 면허를 얻어 외국인 대상의 관광호텔을 운영하자고 제안한다.
가난하던 시절 호텔에 한이 맺힌 B 사장에겐 솔깃한 얘기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걸리는 부분들이 있다. 설계와 시공, 자재 조달과 운영까지 맡기면 실익은 K 전무가 다 챙기고 손해는 고스란히 B 사장 몫이 된다. 면허와 시설 허가를 위해 경찰 등 관계 기관에 다니고 투자를 유치한다면서 뿌리는 돈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 B 사장은 K 전무에게 “좋은 사업이면 당신 돈도 투자하라”고 요구하면 된다. 정정당당하게 지분만큼 권한을 행사하고 이득도 나눠 가지라는 얘기다. ‘한 가족’, ‘주인의식’ 운운하면서 막상 지분을 허락하지 않고 충성만 강요하면 사람들은 자기 살길을 찾게 된다.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면 싸우다 죽자는 주전파(主戰派)와 살길을 찾자는 주화파(主和派)가 맞선다. 냉철한 상황 판단에 따른 결론이라면 어느 쪽이든 타당하겠지만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영악한 정치꾼은 “폐하의 굴욕은 용서할 수 없으니 나가서 싸우자”며 못난 왕을 감동시키고 정적을 적과 내통하는 반역자로 몰아붙인다(싸움터로 내몰아 죽이기도 한다).
전쟁이 끝나면 적장에게 무릎 꿇은 굴욕을 못 잊는 못난 왕을 끼고 권세를 키운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전쟁과 세상 이치를 아는 똑똑한 왕이라면 나가서 싸우자는 대신에게 “충심이 가상하니 당신이 나가서 싸우라”고 맡긴다.
전후의 수습 과정에서도 미리 내다보고 준비하지 못한 잘못을 반드시 가려 경계한다. 거짓으로 주장하면 벌을 받고 꼭 필요한 사람이 돈을 더 내게 하는 게임 이론의 지혜와도 일맥상통한다.이해관계를 넘어선 속마음그럴듯한 말과 글에 현혹돼 속사정을 뚫어 보지 못하는 경영자는 결국 바보가 된다. 어지간히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민감한 사안을 서로 입맞춰 질질 끌다 마지막 순간에 들이대 결재를 받아내는 월급쟁이들의 필살기에 바보가 된다. 정보의 빈틈에서 비밀을 무기로 권세를 키우는 기업 내시들의 정치가 더해지면 ‘벌거숭이 임금님’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회사는 돈 벌기 위해 모인 조직이지만 구성원들의 생각은 훨씬 복잡하다. 금전적 이해보다 소신이 더 중요한 사람도 있고 회사 안팎의 평판과 사회적 관계가 더 중요한 사람도 있다.
소신과 사회 관계는 돈이 아닌 가치관의 문제여서 동기 부여 수단이 막막하고 인간에 대한 훨씬 심오한 이해가 필요한데, 경영학 책과 달리 소신과 관계는 돈 앞에 약하다. 소신은 사람마다 다르니 뭉치기 어려워 돈을 중심으로 얽혀 들이대는 이해 집단에 밀리기 때문이다.
돈이 다가 아닌데 막상 소신과 관계는 모호하고 무력하니 경영자가 현안의 속사정을 뚫어 보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럴수록 경영자는 예상 질문까지 짜 맞춘 형식적인 회의, 감동스럽게 꾸민 보고서를 넘어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 속사정을 듣고 교차 검증해야 한다.
실제로 M그룹의 CEO는 사장과 실무자까지 직접 만나 속내를 캐묻고 서로 엇갈리는 내용들을 재확인하면서 사업에 대한 안목이 달라졌다고 고백한 바 있다.
물론 피곤하고 심란한 일이다. 배석자 없이 한두 명 만나 얘기하면 더 쉽게 속을 수도 있고 편하게 뱉은 말 한두 마디로 구설에 오를 수도 있다.
경영자의 뜻이 마구 왜곡 전파되는 ‘독대의 함정’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럴듯한 회의와 행사가 갖는 상징적 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답은 간단하다. 필요한 일은 모조리 열심히 하면 된다. 그렇게 힘든 일이니까 더 큰 권한과 보상, 명예까지 주는 것이다. 골방 구석에서 서류나 외워 대고 편한 사람만 대하다 망한 역사의 교훈을 되새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