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자동차 공장이 멈췄다. 자동차의 주요 부품인 차량용 반도체의 품귀 현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반도체 공급난이 가전과 스마트폰 등 타 업종으로 확산되고 있다. 수요 증가에 공급 업체의 몸값이 뛴 것은 물론이다. 전 세계가 파운드리(위탁 생산)를 주목하고 나섰다. 미국과 유럽은 파운드리가 아시아에 편중돼 있다며 자국 내에 자체 공장을 짓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그 배경엔 G2 간 패권 경쟁이 숨어 있다. ‘산업의 쌀’을 넘어 ‘국가 안보’가 된 반도체, 열강의 반도체 패권 경쟁 그 중심에 선 ‘반도체 코리아’를 조명했다.
“8일부터 16일까지 평택공장 자동차 생산을 중단한다.” (4월 8일 쌍용차 전자공시)
턱밑까지 차올랐다. 지난해 말부터 독일의 폭스바겐,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 일본의 혼다 등 세계 완성차 업체들이 차량용 반도체를 구하지 못해 공장 가동을 멈추는 상황에서도 한국의 완성차업계는 반도체 재고를 쌓아둔 덕에 세계적 대란을 비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주 한국 완성차업계에도 반도체 수급 대란이 번졌다. 쌍용차는 4월 8일 생산 중단의 이유로 ‘자동차 반도체 소자 부품 수급 차질’ 때문이라고 밝혔다. 현대차 또한 4월 14일까지 울산1공장의 가동을 중단하기로 했고 한국GM은 이미 부평2공장 가동률을 50%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반도체 수급에 문제가 생긴 것은 코로나19가 터진 작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자동차 판매가 감소할 것으로 예측한 완성차 기업들이 차량용 반도체 부품 주문을 줄이면서 파운드리 업체 역시 차량용 반도체 생산량을 줄였다. 그런데 2020년 하반기부터 자동차 판매가 급증했다. 업계 예상보다 빠른 경기 회복 사이클을 반도체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계 곳곳에 자연재해가 발생해 반도체 수급난에 기름을 부었다. 주요 파운드리 공장이 들어선 대만·미국·일본 등에서 지진·정전·가뭄이 발생해 생산 차질이 불가피했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반도체 품귀 현상이) 심각한 수준”이라며 “각국이 올해 초 대만 파운드리에 긴급 SOS를 보내며 급한 불을 끌 수 있을 것으로 봤는데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자연재해가 터지면서 반도체 공급 부족이 심화됐다”고 말했다. 시장 정보 제공 업체인 IHS마킷은 자동차 반도체 공급망 차질로 올 1분기 자동차 생산이 100만 대 가까이 미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르면 올 3분기, 늦으면 연말, 일각에선 내년까지 반도체 부족 문제가 장기화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애플 최대 협력사인 폭스콘의 류양웨이 회장은 “글로벌 반도체 부족 현상이 2022년 말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며 “차량 반도체뿐만 아니라 다른 반도체 분야도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바이든 “공급망 재검토하라”
극심한 반도체 수급난은 전 세계에 경각심을 일깨웠다. 스마트폰·노트북·자동차·전기밥솥까지 우리의 일상에 반도체가 침투한 상황에서 반도체 수급난은 곧 나라 경제의 비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각국은 지역주의를 꺼내들었다. 파운드리를 보유하지 못한 국가들은 ‘내 집 앞마당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차량용 반도체를 구하지 못해 공장 가동이 멈춘 미국과 독일에서 이 같은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대만의 TSMC, 한국의 삼성전자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을 양분하다 보니 ‘공급망 공포’가 닥친 것이다. 닛케이 아시아 리뷰에 따르면 2020년 2분기 기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TSMC(대만) 51.5%, 삼성전자(한국) 18.8%, 글로벌파운드리(미국) 7.4%, UMC(대만) 7.3%, SMIC(중국) 4.8% 순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와 관련해 공급망 재검토를 지시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500억 달러(약 56조원) 투자 계획에 이어 지난 4월 7일 반도체 인프라 투자 법안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법안 발의 계획을 밝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유럽 역시 반도체 자립론을 폈다. 페터 알트마이어 독일 경제부 장관은 최근 유럽연합(EU) 내 반도체 제조 기술 발전 프로젝트에 “10억 유로를 즉각 투입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EU는 2030년까지 전 세계 반도체 제품의 20%를 EU 내에서 생산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등에 업은 기업들은 승부수를 띄웠다. 미 반도체 기업인 인텔은 지난 3월 200억 달러(약 22조6600억원)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 주에 신규 반도체 공장 2개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과거 2016년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했다가 2년 만에 철수한 인텔이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재진출을 선언한 셈이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3월 25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지리적으로 균형 잡힌 공급이 필요하다”며 “세계는 혼란과 도전에서 벗어나 더 균형 잡힌 방식으로 미국과 유럽에 반도체를 공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파운드리 고객사로 아마존·구글·마이크로소프트·퀄컴·애플 등을 끌어올 것”이라며 이들 기업을 기존 고객사로 가진 TSMC와 삼성전자에 사실상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이 던진 승부수는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 정부는 자국 영토로 TSMC와 삼성전자도 불러들였다. 바이든 대통령의 국가 안보 및 경제 보좌관들은 지난 12일 반도체업계 관계자들을 화상회의로 초청했다. 여기엔 삼성전자를 비롯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과 GM 등 자동차 테크 기업이 다수 초청됐다. 바이든은 이날 화상회의에서 "중국과 세계의 다른 나라는 기다리지 않는다"며 공격적 반도체 투자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공화·민주 양당 상원의원 23명과 하원의원 42명으로부터 미국을 위한 반도체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초당적 서한을 받았다고 소개하며, "우리는 어제의 인프라를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이번 화상회의가 TSMC가 이미 지난해 120억 달러(약 14조7800억원)를 투입해 애리조나에 5나노미터(nm) 공정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기로 한 것에 비춰 메모리 반도체 1위이자 파운드리 2위인 삼성전자에도 만만치 않은 청구서를 내미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제기하고 있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소장은 “최선책은 인텔이나 글로벌파운드리 같은 자국 내 기업들이 파운드리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지만 수년 내에 1~2위 기업의 양산 수준을 따라가기 어려워 자국 영토에 TSMC와 삼성전자를 불러들이는 차선책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세계 파운드리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대만과 한국의 파운드리 기업이 (전쟁 등으로) 무너지면 자국의 산업 전반이 무너진다는 불안감이 반도체 자립을 야기한 것”이라며 “미국과 유럽 쪽에서 볼 때 대만은 언제든 중국이 침공할 수 있는 상황이고 한반도 역시 전쟁 위기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의) 배경엔 중국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마크 리우 “미·중 갈등이 배경”
마크 리우 TSMC 회장 역시 반도체 공급망의 불확실성은 파운드리의 지역적 편차가 아니라 미·중 간 갈등에 그 이유가 있다고 강조했다. 리우 회장은 3월 30일 대만 반도체산업협회 행사에 참석해 “(미국의) 화웨이 제재로 다른 모든 경쟁 업체가 남은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기 위해 뛰어들었다"며 "화웨이 수출 규제로 반도체 업체들은 생산량을 다른 업체에 공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불확실성으로 “현재 시장에 실사용량보다 더 많은 반도체 칩을 주문하는 심각한 이중 예약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며 “현재 전체 반도체 생산 능력은 여전히 실제 시장의 수요보다 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화웨이는 지난해 미국 정부 제재로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사용이 불가능해지고 이어 TSMC로부터 첨단 반도체 조달을 받지 못해 스마트폰 사업을 접어야 할 지경에 처했다. 화웨이는 미국 제재에 대비해 대량 재고를 비축해 버텼으나 올해에는 신제품 출시를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반도체 제국의 미래’를 쓴 정인성 씨는 “미·중 무역 갈등으로 인해 화웨이뿐만 아니라 SMIC(중국 파운드리)가 만들던 각종 저부가 가치 반도체의 공급이 감소해 중국권 파운드리의 부담이 늘어난 상황이었다”며 “(미·중 갈등으로) 공급망이 불안해진 완제품 업체들이 재고를 쌓으려는 움직임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종호 소장 역시 “오바마 정부 시절 대통령에게 보고된 한 보고서 내용의 대부분이 중국 반도체굴기에 대한 대응책이었다”며 “미·중 간 반도체 갈등은 바이든 정부에서 새로 시작된 게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 버락 오바마 등 미 전 행정부에서 일관되게 펼친 정책”이라고 덧붙였다.
미·중 간 갈등이든, 지역적 불균형이든 한국으로선 반도체 수급 대란이 위기이자 기회다. 이 소장은 “대만과 함께 한국에도 엄청난 기회는 맞다”면서 “TSMC는 중국의 장사 마인드에 미국의 합리성을 더한 회사다. 우리도 전략을 잘 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위를 달성하기 위해 1160억 달러(약 133조원)를 투자하는 계획을 2019년 내놓은 상태다. 경쟁사이자 현재 업계 1위인 TSMC는 2023년까지 반도체 생산 및 연구·개발에 113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미국은 500억 달러를 반도체 육성 예산으로 책정했다.
강성철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선임연구위원은 “삼성전자만의 투자로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며 “정부는 물론 소부장 업체와 산학연 등 관련 생태계가 모두 나서 시스템 반도체 육성에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강 선임연구위원은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이 이끄는 반도체 수요를 감당하려면 한국 역시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며 “이번 반도체 자국주의 패러다임으로 한국의 반도체 유관 관계자 모두가 변혁의 의지를 일깨웠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부도 곧 반도체 공급망 대책을 수립 발표할 예정이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4월 9일 반도체협회 회장단과 만난 자리에서 “최근 반도체 산업은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간 경쟁에 직면했다”며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정부도 업계의 건의 사항을 반영해 한국 반도체 산업 생태계 강화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공급망 대책을 수립해 조만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