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비유하면 한화는 위나라, LIG넥스원은 촉나라, KAI는 오나라에 가깝다.” 한국의 방산업계에 예전부터 전해지는 말이다. 한화·LIG넥스원·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핵심 3사를 매출과 기업 규모에 따라 중국 삼국 시대의 위·촉·오나라에 빗댄 것이다.
한국의 방산 시장 규모는 2019년 기준 14조4500억원 규모다. 그중 (주)한화·한화에어로스페이스·한화시스템·한화디펜스 등 한화 4사가 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40%로 조조가 세운 위나라에 비견될 만하다. 매출 비율이나 연구·개발(R&D) 투자비용 역시 3사 중 가장 많다.
촉나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기반을 닦은 국가다. 후발 주자인 만큼 국력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인구 숫자가 적다. 이는 미사일 ‘천궁·현궁’을 생산하는 LIG넥스원과 비슷한 상황이다.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16%로 3사 중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T-50 전투기와 ‘수리온’ 헬기를 생산하는 KAI는 손권이 세운 오나라에 견줄 수 있다. 중국 강남 지역에 터를 둔 오나라는 매일 같이 전쟁이 벌어지던 중원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안정적으로 세력을 유지했다. 한국수출입은행이 지분 26.41%를 보유해 공기업 성격을 가진 KAI와 흡사한 모습이다.
장기간 굳어진 육해공 점유율 지형
방산 3사의 점유율은 위·촉·오 삼국의 지형처럼 장기간 변화하지 않았다. 무기 체계를 개발·생산·공급하는 방산 사업은 1970년대부터 본격화됐다. 정부가 주요 수요자로, 방위사업청 등과 조달 계약을 통해 사업이 진행된다. 방위 산업의 특성 때문이다. 미세한 변동이 있기는 했지만 눈에 띌 만한 변화는 없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국방 예산은 이전 정부보다 1조원 정도 더 늘었다. 2018년 43조1581억원, 2019년 46조6971억원, 2020년 50조1527억원 등이다. 올해는 52조8401억원이다. 그중 군사력 발전에 투입되는 방위력 개선비는 16조9964억원으로 150억 달러가 넘는 금액이 무기 개발이나 구매에 쓰인다.
해외 기업에서 무기를 수입하는 데 쓰이는 금액을 제외하면 방위력 개선비는 대부분 한국 방산 기업의 매출이 된다. 각 사의 무기 포트폴리오에 맞춰 예산이 분배된다. 2010년대 들어 방위 산업을 주력 사업으로 삼은 한화는 화약, LIG넥스원은 미사일과 어뢰, KAI는 항공기 등을 수주해 왔다.
현 정부 들어 예산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국방비는 갑자기 늘어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반대로 크게 줄어들지도 않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풍랑에도 방산업계가 다른 산업군에 비해 큰 타격을 받지 않은 이유다. 오히려 실적이 늘어난 곳도 많다.
한화시스템이 대표적이다. 방산 부문의 대형 수주 릴레이에 힘입어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1조6428억원, 928억원이다. 2018년 대비 매출은 6.3%, 영업이익은 8.3% 늘었다. 한국형 차기 구축함 전투 체계와 다기능 레이더 개발 사업 등 1조4000억원 규모를 수주해서다.
하지만 주요 고객이 국가인 만큼 부침 없이 매년 엇비슷한 실적만 기록하는 것은 방산업계의 큰 고민이다. 반도체·정보기술(IT)업계는 슈퍼 사이클 흐름에 맞춰 급성장해 임직원에게 ‘성과급 잔치’ 등을 열어 왔다. 이에 따라 우수한 R&D 인력도 IT업계 등에 몰린다. 고만고만한 실적을 기록해 상대적으로 급여 체계가 낮은 방산 기업이 심각한 인재 부족 현상을 겪는 배경이다.
방산 업체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방 예산에 기반한 방위 산업 외에 민수 사업 강화에 발벗고 나섰다. 우수 인재 유치와 지속적인 ‘우상향 성장’을 위한 결정이다. 방산은 안정적인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낮은 수익성이 큰 단점이다. 3사는 민수를 핵심 사업으로 선정하고 조직 개편과 함께 여러 민간 기업과 업무협약(MOU)으로 외형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고착화된 육해공 전장이 아닌 우주로 눈을 돌렸다.
방산 삼국 ‘육해공→우주’ 전장 이동
방산 사업은 그동안 국방 예산에 따라 외형 성장이 결정되는 길을 걸어왔다. 반면 민수 사업은 일반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로 국방비와 관계없이 실적 향상을 꾀할 수 있다. 한화·LIG넥스원·KAI 등이 택한 새로운 전장은 ‘우주’다. 민간 기업이 우주 산업을 주도하는 이른바 ‘뉴 스페이스’ 시대를 주도하기 위한 각축전이 육해공을 넘어 우주에서 펼쳐지는 모습이다.
500조원 규모의 우주 산업은 엘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로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머스크 CEO는 2002년 “화성에 인간을 보내겠다”는 야심찬 선언과 함께 스페이스X를 설립했다.
시장에선 머스크 CEO다운 ‘괴짜의 망상’이라고 치부했지만 스페이스X는 민간 기업이 만든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우주 화물선인 ‘드래건’ 발사에 성공했다. 이 기업은 현재 미국 비상장 기업 중 최고의 몸값을 자랑한다. 설립 당시의 기업 가치는 2700만 달러(약 301억원), 현재는 740억 달러(약 82조6000억원)로 성장했다.
한국의 방산 기업 역시 한국판 스페이스X를 꿈꾸며 우주 산업에 도전장을 던졌다. 물론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한국 기업 중 우주 사업으로 연매출 실적이 1000억원이 넘는 곳은 KAI밖에 없다. 전사 매출이 1조원을 넘는 기업 중 우주 매출 비율이 3%가 넘는 곳을 찾기 힘들다. 쎄트렉아이와 인텔리안테크 등 글로벌 우주 시장에서 높은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도 있지만 정부 주도로 우주 산업이 진행되는 만큼 민간 기업으로의 기술 이전 등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방산 3사는 선진 기술 확보와 조직 개편으로 뉴 스페이스 시대를 선도할 움직임으로 보이고 있다. 한화는 김승연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사장을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 중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에 산업 전반을 지휘할 ‘스페이스 허브’를 출범시키고 사령탑에 김동관 사장을 선임했다. 이 조직은 발사체·위성 제작, 통신·지구 관측, 에너지, 서비스 분야로 구분돼 관련 R&D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위성 제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LIG넥스원과 KAI도 마찬가지다. 2019년 세계 우주 산업의 시장 규모는 3660억 달러(약 408조6000억원)다. 그중 위성 산업은 2710억 달러(약 302조5000억원)로 전체 시장에서 74%를 차지한다.
위성 발사는 매년 4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10년간 연평균 230대의 위성이 우주로 향했다. 2030년에 들어서면 990대가 발사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한국의 위성 개발 기술은 세계 10위권으로 평가받는다. 로켓 기술은 아직 미흡하지만 중형 위성 분야에선 독자적인 설계·운용 능력을 자랑한다. 한국 방산 기업이 위성 개발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다.
위성 산업은 크게 제작·발사·위성 서비스 등으로 나뉜다. 위성 제작은 위성체와 발사체로 구분된다. 한화는 최근 위성 전문 기업 쎄트렉아이의 지분을 인수했다. 쎄트렉아이는 발사체를 제외한 위성 본체부터 지상체까지 제작할 수 있다. 에어로스페이스는 발사체 제작에 강점을 가지고 있어 위성 제작에 관한 모든 기술력을 확보한 셈이다.
한화시스템은 ‘위성의 눈’으로 꼽히는 전자과학·적외선·고성능 영상 레이더 기술을 모두 보유한 한국 유일의 기업이다. 2009년 다목적 실용 위성 아리랑 3A호의 적외선(IR) 센서 개발을 시작으로 위성 탑재 장비 고도화에 투자를 늘리는 중이다.
LIG넥스원은 100kg 이하급 초소형 위성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국적 위성인 우리별 1호를 개발한 카이스트와 손잡고 차세대 소형 위성을 연구·개발 중이다.
이 위성에는 한국형 위성항법시스템(KPS)이 탑재될 전망이다. 한국은 자체 시스템이 없어 미국의 위성항법시스템(GPS)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GPS 정보 제공이 중단되는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 등이 멈추는 패닉이 발생할 수 있다. 이를 대비해 LIG넥스원은 2035년 KPS 서비스 개시를 목표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KAI는 500kg 이상 중·대형 위성 시스템과 본체 개발·제작 기술을 보유 중이다. 중·대형 위성 6~8기를 동시에 조립할 수 있는 한국 최대 규모의 민간 우주센터를 지난해 8월 건립하기도 했다.
KAI 관계자는 “위성·발사체의 하드웨어 플랫폼 확보 중심에서 서비스 중심의 시장 선도형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관련 기업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에선 차세대 중·대형 위성 고도화와 함께 뉴 스페이스 시대를 선도할 독자적인 밸류체인을 구축한다는 목표다. 위성 제조와 지상국 분야 진입, 활용 서비스 등 사업을 확장해 토털 솔루션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포부다.
박범지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우주 산업에서 최근 주목할 점은 정부 주도의 군사·안보·연구 목적의 개발과 다르게 상업적 목적에 의해 민간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뉴 스페이스 시대에는 민간 자본을 바탕으로 자율 경쟁이 이뤄져 큰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위성에 투자가 집중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한국의 방산 기업은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혁신 기술에 도전하고 있다”며 “특히 전 세계의 인터넷 연결을 목적으로 하는 중형·저궤도 위성이 한국의 강점인 만큼 이 분야를 중심으로 R&D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방산 삼국’ 방향타, 한화가 쥐고 있다
향후 한화의 움직임에 ‘방산 삼국’의 방향타가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한화가 굳건한 방산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KAI 인수에 다시 나설 것으로 시장은 보고 있다. 이는 김승연 회장의 뚝심과 의지에서 비롯된다.
김 회장은 2015년 삼성탈레스·테크윈 등 삼성그룹의 방산 기업을 인수하면서 ‘한국판 록히드마틴’ 완성의 초석을 닦았다. 기존의 탄약과 정밀 유도 무기 중심에서 자주포와 항공기·함정용 엔진 및 레이더 등의 방산 전자 사업, 발사체 제조 등까지 영역을 넓혀 글로벌 종합 방산 회사로 나아간다는 포부였다.
KAI는 1999년 항공기 제조업체인 대우중공업·삼성항공·현대우주항공 항공사업부문이 통합해 설립된 기업이다. 국산 군용기 대부분을 개발하고 있어 전투기 엔진과 렌딩기어 등 핵심 부품을 생산하는 한화가 인수하면 전투기 사업의 수직 계열화가 완성된다. 진정한 항공 방산 업체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셈이다.
시장에선 한화가 KAI 인수에 나설 시점을 다음 정부 출범 이후로 보고 있다. 방위 산업의 특성상 정부의 영향력이 크고 KAI의 최대 주주가 수출입은행이기 때문이다. 또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 KAI 민영화에 확실한 반대 의사를 내비친 만큼 현재 정권에선 사실상 불가능하다.
업계 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사천을 찾아 KAI 민영화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며 “한화가 KAI를 인수할 것이란 내용은 방산 시장에서 기정사실화된 내용으로 정책의 변화에 따라 인수 움직임이 나타날 것”이라고 귀띔했다.
‘돈나무 누나’ 캐시 우드, 다음 투자처로 우주 ‘픽’
투자 시장에서 ‘돈나무 누나’라는 별명을 얻은 월가의 스타 펀드매니저 캐시 우드가 상장지수펀드(ETF)로 우주를 선택했다. 운용하는 ETF마다 대박을 터뜨렸던 우드 펀드매니저가 우주를 차세대 성장 산업으로 점찍은 것은 해당 분야가 뚜렷한 성장세를 보일 것이란 방증이다.
우드 펀드매니저는 3월 30일 우주 산업 관련 종목이 담긴 ‘아크우주탐사ETF(ARKX)’를 출시했다. 글로벌 우주 탐사 기업에 투자해 장기적 수익 창출을 목표로 한다. 5년간 연평균 20%의 수익률을 장담했다. 출시 첫날 거래 규모는 2억9400만 달러로 ETF 역사상 여덟째로 많아 화려한 데뷔전을 치렀다.
ARKX에는 위성 전화 업체 이리듐과 버진 갤럭틱, 방산·항공 기업 크레이토스·L3해리스·록히드마틴·보잉 등이 포함됐다. 해당 기업은 이미 ‘캐시 우드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ETF에 담길 것으로 알려진 기업들은 이미 주가 급등을 경험했다. 이리듐은 ARKX가 출시될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 1월 이후 한 달 새 주가가 25% 올랐다.
한국 방산 기업의 주가도 탄력을 받았다. 한국항공우주와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올해 1~3월 주가가 각각 42.05%, 39.3% 올랐다. LIG넥스원도 28.2% 상승했다. 모건스탠리는 우주 산업 규모가 2040년 들어 1조 달러로 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우드 펀드매니저가 우주를 새 투자처로 설정한 것처럼 시장 규모와 관련 기업의 성장세는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올드 스페이스 vs 뉴 스페이스
우주 산업에서 최근 주목할 점은 과거 정부 주도의 군사 목적 개발과 다르게 상업적인 목적으로 민간 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도 주체에 따라 올드 스페이스와 뉴 스페이스로 구분된다.
뉴 스페이스는 민간 자본을 바탕으로 자율 경쟁을 펼쳐 혁신적이고 위험을 감수하며 개발 속도가 빠르다는 점이 특징이다. 스페이스X처럼 대기업 자본을 바탕으로 탄생한 기업이 뉴 스페이스의 대표적 사례다. 반면 정부 주도의 올드 스페이스는 보수적이며 위험을 회피하고 신뢰성이 중요해 기술 개발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우주에 대한 정부 정책 변화도 감지된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972년 아폴로 17호 이후 중단됐던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유인 달 착륙을 승인하는 우주 정책 지침 1호를 승인하면서 1993년 폐지됐던 국가우주위원회가 부활했다. 2019년 3월에는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이 유인 달 착륙의 기한을 2024년으로 발표했고 같은 해 5월 NASA에서 달 착륙 프로젝트의 공식 명칭을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이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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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민간 기업의 참여다. 우주정거장까지는 NASA 우주선이 이용되지만 우주정거장에서 달까지는 민간 기업의 우주선이 활용된다. 국가 도움으로 민간 기업의 기술 개발이 가속화되는 셈으로 뉴 스페이스 시대가 성큼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