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은 고용 시장에도 큰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여행업이나 항공업뿐만 아니라 제조업과 금융권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기업들의 영업이익이 급감하고 무급 휴가는 물론 희망퇴직 등 조기 퇴직이 곳곳에서 시행된 게 이를 증명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명예퇴직을 둘러싼 법적 분쟁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명예퇴직을 법률적으로 정확히 풀어보자면 정년에 도달하지 않은 노동자들이 일정 기준을 충족할 때 회사와의 근로 계약 관계를 끝내는 제도다. 노동자의 자발적인 의사가 있어야 하고 퇴직금 이외의 별도 보상 등 우대 조치가 따라야 한다.
최근 명예퇴직을 신청하라는 공지를 받지 못해 신청하지 못한 경우에도 퇴직 수당을 주는 게 정당하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전직 판사 출신인 A 씨의 이야기다. 명예퇴직 수당 지급 요건을 법리적으로 짚은 판례인 만큼 퇴직 수당 관련 쟁점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게 법조계의 분석이다.
공지 못 받아 명예퇴직 신청 못했다면?
…法 “퇴직 수당 줘야”
7월 27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부장판사 한원교)는 전직 지방법원 부장판사 A 씨가 법원행정처를 상대로 “명예퇴직 수당을 지급하지 않기로 한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낸 행정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수원지법 안양지원 소속 부장판사로 일하던 A 씨는 2020년 2월 한 지방자치단체 개방형 부시장 채용에 지원하기 위해 법원에 사직서를 냈다. 이후 명예퇴직 처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법원행정처는 A 씨가 명예퇴직 신청 기한을 지키지 않았다며 A 씨를 명예퇴직 대상에서 제외하고 퇴직 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
법원행정처가 지정한 명예퇴직 신청 기한은 2019년 12월 20일, 수당 신청 기한은 2020년 1월 10일이었기 때문이다. A 씨는 이에 불복해 “퇴직 수당의 지급 계획을 알지 못했다”며 행정 소송을 냈다.
실제 A 씨는 명예퇴직 수당 지급 계획을 사전에 고지받지 못한 게 맞았다. 앞서 법원행정처는 ‘2020년도 법관 명예퇴직 수당 지급 계획’을 전국 법원에 통지했지만 A 씨가 근무하던 안양지원은 이를 소속 법관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1심 재판부는 A 씨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행정처는 “각급 법원에 통보하면서 소속 법관들에게 알리라고 명시했기 때문에 통지 의무를 모두 이행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법원행정처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각급 법원이 해당 내용을 소속 직원들에게 통보하지 않았을 때는 이를 통보하도록 지휘·감독할 책임이 법원행정처에 있다고 봤다. 즉 “피고가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은 이상 명예퇴직 수당 신청 기간 내에 신청하지 않은 불이익을 원고에게 돌릴 수는 없다”고 판시한 것이다.
또 “원고가 뒤늦게 지급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하더라도 이 신청서가 신청 기간 내에 제출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부연했다. 이어 “원고가 신청 기간 내에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은 것 외엔 다른 지급 요건을 모두 갖췄으므로 지급 대상자에 해당한다”고 봤다. 법원행정처는 이 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상태다.
약식 명령으로 처벌 끝난 장군…法 “명예 전역 수당 지급”
한편 군인의 경우 군 복무 중 비위 행위에 연관돼 수사를 받았어도 약식 명령 처벌에 그쳤다면 명예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고 판결난 것도 있다.
2016년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재판장 강석규)는 전 국군 수송사령부 사령관 이 모 준장이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명예 전역 수당을 지급하라”고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1983년 임관한 이 전 준장은 2015년 2월 수송사령부 사령관을 끝으로 명예 전역을 신청했다. 국방부는 20년 이상 근속한 군인이 명예퇴직할 경우 예산 범위 내에서 명예 전역금을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 준장은 2015년 4월 직권 남용 권리 행사 방해 혐의로 군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이에 국방부는 나흘 뒤 열린 명예 전역 수당 심의위원회(심의위)에서 이 전 준장에게 명예 전역 수당을 지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국방부 훈령에 따르면 수사 기관에서 비위 조사나 수사 중인 자는 명예 전역 수당 지급 대상자에서 제외된다. 다만 정식 재판이 아닌 약식 명령으로 처벌이 끝난 경우는 예외다. 이 전 준장은 해당 사건과 관련해 벌금 500만원의 약식 명령으로 처벌받게 됐다. 이에 그는 국방부에 전역 수당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국방부는 거부했고 소송전으로까지 번졌다.
재판부는 이 전 준장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봤다. 이 전 준장이 전역을 늦출 수 있었다면 약식 명령 처분 뒤 심의위 심사를 받아 명예 전역 수당 지급 대상이 될 수 있었다는 판단에서다.
재판부는 “이 전 준장에 대한 심사가 약식 명령이 청구된 날짜 이후 실시됐다면 명예 전역 수당 지급 대상자에 해당할 여지가 있었다”며 “이 전 준장은 심사위원회 개최 일자라는 우연한 사정으로 ‘명예로운 전역 여부’에 대한 실질적 심사도 받아보지 못한 채 선발 대상에서 제외됐다”고 봤다.
이어 “이 전 준장은 전역 일자가 특정 날짜로 고정돼 있었기 때문에 수사 중 심의위의 심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며 “이 전 준장에 대한 군의 처분은 지나치게 가혹해 재량권을 일탈·남용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했다.
“회사 강요로 퇴직” KT 직원들…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최근 사기업 가운데 명예퇴직을 둘러싸고 수년에 걸친 법적 다툼을 벌이는 곳이 있다. KT와 이곳에서 근무 후 명예퇴직한 직원들이다. KT에서 2014년 명예퇴직한 직원들이 “퇴직은 회사의 강요 때문이었다”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해 1심 패소에 이어 2심에서도 패소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2021년 5월 서울고법 민사38-2부(부장판사 이호재·김갑석·김민기)는 남 모 씨 등 명예퇴직한 전직 KT 직원 68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해고 무효 확인 청구 소송에서 1심과 같이 원고 패소 판결했다.
KT는 2014년 4월 노사 합의에 따라 실질적인 근속 기간이 15년 이상이면서 정년 잔여 기간 1년 이상인 직원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아 8300여 명을 명예퇴직시켰다. KT 노조원들은 “합의 과정에서 노조원들의 의사를 수렴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며 노조와 위원장 등을 상대로 손해 배상을 청구해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받았다.
이후 퇴직자들은 회사 측을 상대로도 소송을 냈다. “해당 명예퇴직은 불법 정리 해고이므로 원천 무효”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1심은 명예퇴직을 KT 측의 강요에 따른 해고라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은 당시 명예퇴직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피고의 구조 조정 계획, 퇴직 조건 등 제반 사항을 고려해 심사숙고한 결과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이라고 판단해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이어 “노사 합의 체결 과정에서 일부 노조 내부 절차를 위반했지만 그것만으로 노사 합의의 유효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또 “2013년 당시 당기순손실이 약 3923억원인 점 등을 보면 당시 구조 조정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을 잘못됐다고 할 수 없다”고도 판시했다.
앞서 KT 노사는 2014년 4월 ‘회사 사업 합리화 계획’에 따라 업무 분야 폐지 및 축소, 특별 명예퇴직 실시 등에 합의했다. 당시 8304명을 한 번에 내보내는 것은 단일 사업장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퇴직자들은 관련 노사 합의를 ‘밀실 합의’로 규정하고 이에 따른 대규모 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섰다. 처음 소송에 참여한 퇴직자는 255명이었으나 이 중 68명만이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2심에서도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