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393만 명. 2020년 8월 기준 한국 노동 시장에서 일하는 기간제 노동자의 숫자다. 전체 취업자 중 19.2%. 전년과 비교해 숫자(380만 명)도, 비율(18.5%)도 늘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퍼지면서 전체 취업자 수는 줄었다. 이 와중에도 기간제 형태로 고용된 이들은 되레 증가한 것이다.
전체 노동 시장에서 기간제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때 ‘비정규직’이란 근로 형태가 도입되면서 기간제 근로가 본격화된 이후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의 여파로 그 비율이 정점을 찍는 모습이다.
동시에 이들의 근로 형태를 둘러싼 법적 분쟁도 도드라지고 있다. 이번에는 교육계를 중심으로 기간제 근로 관련 이슈를 소개한다.
새 계약 후 4년 못 채운 기간제…행법 “부당 해고 아냐”
8년 동안 근무한 기간제 교사를 해임하더라도 중간에 공개 채용 절차가 있었다면 부당 해고로 볼 수 없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기존의 기간제 근로 계약 관계가 단절된 후 4년이 지나기 전 해고 통보를 받는다면 적법하다는 취지다.
이달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유환우 부장판사)는 A 학교법인이 중앙노동위원회위원장을 상대로 낸 부당 해고 구제 재심 판정 취소 소송에서 최근 “중앙노동위원회의 재심 판정을 취소한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B 씨는 2011년 3월 A 학교법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기간제 영어 회화 강사로 채용됐다. 매년 계약을 갱신하다가 2015년 2월 신규 채용 절차를 통해 재임용돼 근무를 계속했다. 이전 채용 계약이 종료돼 퇴직금을 받았고 신규 계약은 서류 접수 등 채용 절차를 거쳐 새롭게 이뤄졌다.
하지만 2019년 1월 B 씨는 학교 측으로부터 “다음 달부터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에 B 씨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 해고를 당했다고 구제 신청을 내 인용됐다. A 학교법인은 이에 불복해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했지만 기각됐다. 결국 이 사건은 2019년 12월 중앙노동위원회와 A 학교법인 간 소송전으로 불거졌다.
쟁점은 새로 맺은 기간제 근로 계약이 ‘무기 계약직’ 전환에 효력을 내느냐 여부였다. 초·중등교육법에 따르면 기간제 교사 임용 시 근무 기간 4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계약을 연장할 수 있다. 4년이 넘으면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된 것으로 본다.
A 학교법인은 “2015년 실시한 공개 채용 절차에서 B 씨를 비롯한 지원자들 간 실질적인 경쟁이 이뤄져 B 씨와 우리 사이에는 종전 근로 관계와 단절된 새로운 근로 관계가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새로 계약한 이후 B 씨가 이어 근로한 총 기간이 4년을 초과하지 않기 때문에 ‘기간의 정함이 없는 노동자(무기 계약직)’로 전환됐다고 볼 수 없다는 논리였다.
법원은 A 학교법인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초·중등교육법령에 따라 임용된 후 기간제 근로 계약의 갱신으로 ‘계속 근로한 총 기간’이 4년을 초과한 기간제 영어 회화 전문 강사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 계약을 체결한 노동자로 봐야 한다”면서도 “B 씨는 2015년 3월 근무하던 학교의 공개 채용 절차에 따른 새로운 기간제 근로 계약을 해 기존 기간제 근로 계약 관계가 단절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B 씨를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 계약을 체결한 노동자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새로운 근로 계약을 맺은 B 씨에게 정당한 근로 계약 갱신 기대권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시한 것이다. 중앙노동위원회는 항소한 상태다.
대법 “채용 절차 있었다면 연속 근로로 볼 수 없어”
앞서 대학가의 기간제 근로 기간과 관련한 대법원의 판단이 이미 나온 바 있다. 계약 기간이 끝날 때 별도의 채용 절차가 진행됐다면 재계약이 이뤄졌다고 해도 연속된 근로 계약으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이었다.
2020년 9월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C 씨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 해고 구제 재심 판정 취소 등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C 씨는 D 대학교와 각각 세 차례의 단기 계약을 하고 직장예비군연대 소속 참모로 일했다. 첫 계약이 만료되자 D 대학은 채용 절차를 거쳐 C 씨를 선발했다. 두 번째 계약 기간이 만료된 후 채용 절차 없이 C 씨를 고용했다. 그런데 세 번째 계약 기간이 종료되자 D 대학은 다시 채용 절차를 진행했고 C 씨는 면접에서 불합격했다.
이에 C 씨는 자신이 모든 계약을 통틀어 2년 1개월 동안 일했으므로 기간제 및 단시간 노동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기간의 제한이 없는 노동자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계약을 하지 않은 것은 부당 해고라는 주장이었다.
1심은 “C 씨는 첫 계약 종료 후 공백 기간이 존재하나 매우 짧고 다른 사람이 업무를 대체한 적도 없다”며 “첫 계약과 두 번째 계약 사이 채용 절차가 이뤄졌다고 해도 근로 관계가 단절된다고 할 것은 아니다”고 판결했다.
이어 “전체 기간 동안 근로 관계의 계속성이 유지됐다고 봄이 상당하다”며 C 씨의 손을 들어줬다. 2심도 대학 측의 항소를 기각하며 1심 판결을 유지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법리 해석이 뒤바뀌었다. 별도의 채용 절차가 이뤄졌다면 계약이 중단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판단이 나온 것이다.
대법 재판부는 “채용 절차를 걸쳐 두 번째 계약이 체결됨으로써 C 씨와 D 대학 사이에 근로 계약이 단순한 반복 또는 갱신이 아닌 새로운 근로 관계가 형성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근로한 총 기간이 2년을 초과하지 않으므로 A 씨는 기간제법에 따라 기간의 정함이 없는 노동자라고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 “채용 절차는 실질적인 경쟁이 이뤄진 것으로 보이고 D 대학이 C 씨를 계속 채용하겠다는 의사를 갖고 있거나 C 씨가 첫 계약을 반복 또는 갱신한다는 인식이나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C 씨가 면접에서 불합격한 채용 절차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없다”며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
사실상 ‘5심제’ 노동 분쟁…노동위 거친 후 소송전 이어져
한국의 노동 분쟁은 최대 다섯 단계의 판단을 거친다. 노동자가 회사의 해고·휴직·징계 등의 판단에 불복할 경우 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낼 수 있다. 이게 시작이다.
이후 중앙노동위원회, 행정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으로 이어진다. 크게 행정 구제(노동위원회)와 소송(행정법원)으로 이원화돼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5심제’라고 부르는 이유다.
법조계에서는 ‘노동 사건 전문 법원(노동법원)’ 설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꾸준히 나온다. 노동법원은 이름 그대로 노동 사건만 다루는 법원이다.
노동계는 사실상 5심제인 노동 분쟁 해결 절차를 줄이기 위해 노동법원 설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판사들이 2~3년 주기로 전국 법원을 돌며 순환 근무하는 체제에선 노동법의 전문성을 갖춘 법관들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반면 상당 비율의 사건들이 노동위원회 단계에서 해결되는 상황에서 노동법원 설치는 불필요하다는 반론도 나온다. 매년 노동위원회에 접수되는 부당 해고 사건(약 1만3000건) 가운데 95%가 노동위원회 단계에서 이미 해결된다는 설명이다.
노동자가 변호사를 선임해 행정 소송을 진행하는 것보다 노동위가 훨씬 쉽고 간편한 제도란 주장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