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패션

이브 생 로랑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 카트린 드뇌브, 로저 비비에, 다르 엘 한치, 교모세포종, 피에르호텔, 파리 생 로슈 교회, 니콜라 사르코지, 카를라 브루니

뇌종양으로 고통받다 71세에 영면
카트린 드뇌브·앤디 워홀 등과 깊고 긴 우정 나눠

 

이브 생 로랑 

까뜨린느 드뇌브(왼쪽)와 이브 생 로랑.

이브 생 로랑의 뮤즈는 프랑스의 세계적인 배우 카트린 드뇌브였다. 이브 생 로랑은 “우리는 서로에게 자주 편지를 쓴다. 나는 그녀를 나의 달콤한 캐서린이라고 부르고 그녀는 내게 창백한 색의 장미를 보내준다.”


이브 생 로랑이 카트린 드뇌브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이들의 우정은 이브 생 로랑이 죽을 때까지 길고 깊게 계속됐다. 카트린 드뇌브는 영국의 사진작가 데이비드 베일리와 결혼해 영국 여왕을 알현할 때 입을 옷을 이브 생 로랑에게 주문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들은 이브 생 로랑의 의상을 입었고 카트린 드뇌브는 영화 ‘세브린느(1967년)’에서 의상과 사각 버클이 달린 베르니 구두를 신었다. 현재 로저 비비에의 심벌이 된 사각 버클이 달린 구두는 이브 생 로랑과 로저 비비에와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카트린 드뇌브는 영화 ‘열애(1968년)’, ‘미시시피의 인어(1969년)’, ‘리자(1972년)’, ‘악마의 키스(1983년)’ 등에서도 이브 생 로랑의 의상을 입었다.


1970년 가을 앤디 워홀(미국의 화가, 영화 제작자이며 팝 아트의 대표 주자)이 영화 ‘사랑(L’Amour)’을 촬영하기 위해 파리에 왔을 때 그가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가로 생각하고 있던 이브 생 로랑을 만났다. 앤디 워홀과 이브 생 로랑은 당시의 패션과 가치를 바꾸는 데 많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워홀은 로랑에 대한 오마주로 1972년 그의 초상화 시리즈를 그리기도 했다.

앤디 워홀(오른쪽)과 이브 생 로랑.


새해 인사 카드와 작품에 뱀 단골로 등장

이브 생 로랑은 2007년까지 매년 새해 인사 카드 시리즈를 디자인해 친구·동료·고객들에게 포스터 형태로 보냈다. 그는 매년 새로운 색상으로 카드를 디자인했고 새해 인사 카드에는 항상 ‘사랑(Love)’을 반복했다. 1970년, 1971년, 1973년 인사 카드에는 뱀이 그려졌다. 이브 생 로랑은 춤추는 뱀의 형상을 많이 그렸고 동물은 그의 작업 내내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모로코에서 처음 마련한 집을 다르 엘 한치(Hanch)라고 불렀다. 한치는 아랍어로 뱀이다. 이브 생 로랑의 뱀에 대한 깊은 애정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이브 생 로랑의 동성 연인 피에르 베르제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네 옆에서, 너를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하며 평생을 보냈어. 너를 혼란스럽게 할 만한 것이라면 아무리 중대한 일이라도 말하지 않았지. 다들 감추기에 바빴어.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고 너의 교모세포종(뇌종양의 일종)에 대해 나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어. 말해야 했을까. 물론 내 대답은 아니야. 사업은 정리되었고 유언장도 공증인에게 맏겨져 있었지. 굳이 네게 알릴 필요가 없었어. 의사들 역시 내 의견에 동의했고 네가 스스로의 병을 견딜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이브 생 로랑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교모세포종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브 생 로랑은 낙상 사고가 잦았다. 같은 돌계단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 떨어질 정도였다. 매번 병원에서 몇 바늘씩 꿰매고 왔다. 교모세포종으로 인한 모든 고통은 낙상 사고 탓으로 돌리기로 의사들과 베르제는 입을 맞췄고 이브 생 로랑은 그렇게 믿었다.


베르제는 “네가 진짜 그 말을 믿었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네가 알았다면 내게 두려움과 불안감을 숨기지 않았을 테니까. 너는 일요일 저녁 무렵 그냥 숨을 거뒀어. 그래, 나는 너를 너 자신에게서 보호했어. 너무 심했던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고 주장했고 몇몇 친구들은 이해해 주었어”라고 했다.


한 번은 미국 뉴욕의 피에르호텔에서 이브 생 로랑은 창문으로 몸을 던지려고 했고 밖으로 빨려 나가려는 로랑을 베르제는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또 한번은 경찰 수송차 바퀴 밑으로 뛰어들어가 간신히 몸을 숨겼고 재빨리 따라 들어간 경찰들이 로랑에게 실컷 욕을 퍼부었고 베르제에게 로랑을 데려가 잘 보살피라고 훈계했다. 이렇듯 로랑은 죽음의 연인이 되고자 했다고 베르제는 회상했다.

이브 생 로랑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

 

이브 생 로랑의 1973년 인사 카드. 그의 인사 카드와 작품엔 뱀이 단골로 등장한다.

장례식, 사르코지 등 참석
2000년 1월 7일 이브 생 로랑은 패션계 은퇴를 선언했다. 같은 해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30년간 작업을 이어 온 건물에 경매의 수익금으로 ‘피에르-이브 생 로랑 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베르제가 로랑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의 표현으로 설립했다. 2017년 이브 생 로랑 박물관이 개관됐다. 이곳은 이브 생 로랑이 30년간 디자인하고 창작했던 장소다. 이브 생 로랑이 실제 사용했던 살롱과 스튜디오를 그대로 재현했고 1962년 쿠튀르 무대에 올랐던 작품들과 1966년 발표된 최초의 르 스모킹 슈트, 몬드리안 시리즈, 피카소와 고흐의 재킷에 이르기까지 로랑의 모든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베르제는 2002년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이브 생 로랑 디자인 하우스의 40주년을 기념하는 고별 패션쇼를 열었다. 베르제는 “마치 단두대에 오르는 사람처럼 런웨이에 오르는 너의 모습이 기억나. 사람들이 환호하고 더 크게 브라보를 외칠수록, 너의 고통은 길어졌고 비탄의 그림자도 짙어졌지. 너는 일을 위해서만 살았어”라고 했다.


이브 생 로랑은 2008년 6월 1일 지병인 뇌종양으로 71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파리 생 로슈 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은 마치 프랑스의 국장(國葬)처럼 진행됐고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과 카를라 브루니, 장 폴 고티에, 발렌티노, 존 갈리아노, 크리스찬 라크르와 등 수많은 세계적 디자이너들이 애도했다. 이브 생 로랑은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는 말을 남겼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