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보/트렌드

업을 규정하기 어려운 시대, 사명에서 업종 떼고 지향 가치 담는다 / 문지훈, 인터브랜드, 대한제분, SK온, SK어스온, 바이브런트 디스럽션, 싱크 디퍼런트, 두산인프라코어

문지훈 인터브랜드 한국법인 대표 인터뷰
“SK 필두로 사명 교체 사례 늘어날 것”

 

사명 바꾸는 기업들의 브랜딩 전략

문지훈 인터브랜드 한국법인 대표이사 사장. 사진=인터브랜드 제공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사명이나 기업 이미지(CI)를 교체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사명에서는 특정 업종을 나타내는 단어가 빠지고 기존 사명보다 확장성이 있고 기업의 지향점이 담긴 이름이 각광받고 있다.


과거에는 그룹 브랜드 뒤에 사업 영역에 해당하는 단어를 붙이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사업 영역에서 가치 중심으로 사명이 바뀌는 추세다. 재계에서는 SK그룹 계열사들이 미래 포부를 담으며 사명 변경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인 SK온·SK어스온·SK지오센트릭의 사명은 인터브랜드가 개발했다. 인터브랜드는 세계 최대 고객 경험 컨설팅그룹으로 2013년부터 한국에서 브랜드 가치가 높은 50대 기업을 선정해 ‘베스트 코리아 브랜드’를 발표하고 있다.


문지훈 인터브랜드 한국법인 대표는 “산업·사회·기술의 발전으로 기업이 업(業)을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워지고 있고 사명 변경이 불가피한 시대”라며 “SK를 필두로 많은 기업이 사명에 사업 영역을 표시하는 게 아니라 가치 지향적인 미래 포부와 철학을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문 대표를 만나 사명을 바꾸는 기업들의 브랜딩 전략에 대해 들어봤다. 문 대표는 2011년부터 인터브랜드 한국법인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그동안 현대차·기아의 브랜드 가치 평가, 현대차 신형 에쿠스 브랜드 콘셉트와 슬로건 개발, SK텔레콤 브랜드 전략과 브랜드 체계를 구축하고 SK그룹 계열사의 브랜드 전략 수립에 참여했다.


최근에는 곰표 브랜드로 제2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대한제분의 기업 이미지(CI) 리뉴얼, 차별화된 브랜드 전략으로 보험업계 새 바람을 일으킨 디지털 보험 브랜드 캐롯의 브랜드명과 브랜드 아이덴티티도 개발했다.


-인터브랜드가 SK온·SK어스온·SK지오센트릭의 신규 사명을 개발했다. SK그룹의 사명 변경 전략을 어떻게 보나?
“큰 기업일수록 회사명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보통 기업에서 사명을 바꾸겠다고 결정해 신규 사명 개발을 의뢰하고도 나중에 최종 순간이 오면 선택을 어려워한다. SK그룹이 최태원 회장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가치 지향적인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을 근간으로 회사명을 바꾼 용기와 결단력·실행력을 높게 평가한다.


‘SK온’이나 ‘SK지오센트릭’을 처음 들으면 어떤 일을 하는 회사인지 모르겠다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사명을 통해 사업 영역을 얘기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SK온이 배터리를 갖고 향후 어떤 사업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SK온은 ‘배터리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상을 턴 온(turn on) 시키겠다’는 느낌을 담았다.


배터리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상을 항상 밝고 잘 돌아가게 하는 다양한 사업을 벌이겠다는 지향 가치를 알고 나면 많은 고객이 공감할 것이다. SK그룹을 비롯해 100대 그룹 계열사들이 사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예상한다. 실제로 SK처럼 만들어달라는 사명 개발 의뢰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

문지훈 인터브랜드 한국법인 대표는 과거에는 그룹 브랜드 뒤에 사업 영역에 해당하는 단어를 붙이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사업 영역에서 가치 중심으로 사명이 바뀌는 추세라고 말했다. 사진=이승재 기자

-기업이 사명을 바꿔야 하는 시점이 따로 있나?

“그런 것은 없지만 애플이 2007년 아이폰을 첫 공개하고 사명에서 ‘컴퓨터’를 떼어낸 것처럼 새로운 포부와 실질적인 변화를 보여 줄 수 있을 때가 적절한 시점이라고 본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명확한 리스크가 있을 때 새롭게 주의를 끌기 위해 사명 변경을 시도하는 것이다. 오히려 반감만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브랜드 전략은 왜 중요한가?
“‘이 브랜드의 코어가 무엇이냐’는 물음이 브랜드 전략의 출발점이다. 디즈니는 설립된 지 100년이 넘은 오래된 회사이지만 지금도 새로운 느낌을 주며 인터브랜드의 ‘글로벌 100대 브랜드’ 평가에서도 항상 톱 20위 안에 들어간다. 디즈니의 브랜드 전략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making people happy)’로 굉장히 심플하다.


디즈니 내부 문서에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전 세계의 가족들에게 마법같은 순간들(magical moments)을 제공하는 회사라고 이야기한다. 디즈니 신입 사원 교육서 첫 페이지에는 디즈니에 취직했다는 내용이 아닌 ‘여러분은 마법과 같은 순간을 제공해 주기 위한 쇼에 캐스팅됐다’고 써 있다. 전 세계 많은 사람에게 ‘마법같은 순간들’을 주기 위해 캐스팅된 것이다.


브랜드 전략은 명확하고 일관성 있게 실행돼야 한다. 사업 전략은 실패할 수도, 성공할 수도 있고 때에 따라 빠르게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브랜드 전략은 훨씬 더 영속성을 갖고 가야 한다. 사업 전략, 내부 직원들에 대한 전략 등 모든 전략이 브랜드 전략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하다.”


-브랜드 전략의 성패를 결정하는 요인은 뭔가?
“브랜드 전략에서 절대 실수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신뢰성이다. 어떤 기업이 ‘우린 이런 걸 할 수 있어’, ‘이런 꿈을 펼칠 수 있어’라고 얘기했을 때 사람들이 그 말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의 핵심 역량, 투자 의지, 자본력을 고려해 브랜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그런 다음 조직 내부에서 공감대를 잘 형성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성패를 결정짓는 키포인트다. 디즈니처럼 멋진 전략을 만들었지만 내부 직원들이 공감하지 못하면 그 전략은 구현될 수 없다.”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뭔가?
“CJ그룹 리브랜딩 사례다. CJ는 ‘문화를 만듭니다’, ‘리브 뉴(LIVE NEW)’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 CJ라고 하면 대부분 CJ제일제당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이제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 문화를 만들고 전파하는 CJ ENM이 갖는 파급력이 더 커졌다. 그래서 물류와 식품만이 아니라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정해 그룹의 리브랜딩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때 뽑아낸 전략이 ‘바이브런트 디스럽션(vibrant disruption)’이다. CJ는 일상에서 활력이 넘치는 디스럽션을 하는 회사라는 의미다. CJ대한통운이 배송하는 택배로 그날의 활력을 얻고 비비고를 통해 쉽고 간편하지만 의외로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tvN의 ‘삼시세끼’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일상에서 디스럽션을 한다는 의미다.


‘리브 뉴’는 애플의 ‘싱크 디퍼런트(think different)’처럼 문법에 어긋나는 표현이지만 ‘새로움을 살라’는 의미다. 새로움을 사는 방식을 CJ가 제공하고 옆에서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식품 회사에서 글로벌 생활 문화 기업으로 탈바꿈한 성공적인 리브랜딩 사례다.


브랜딩 사례로는 동서식품의 카누가 기억에 남는다. 집에서도 커피 전문점 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세상에서 제일 작은 카페’라는 콘셉트부터 패키지 개발까지 맡았다. ‘원두커피가 인스턴트로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완전히 뒤집었다.”


-대표적인 리브랜딩 성공 사례가 있나.
“SK이노베이션과 두산인프라코어(현 현대두산인프라코어)는 B2B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가장 많이 벤치마킹하고 싶어하는 회사들이다. SK이노베이션은 SK그룹에서 처음으로 지향 가치를 담은 회사라고 생각한다.
‘이노베이션’이라는 단어가 지금은 흔해졌지만 SK가 선점했기 때문에 이 회사가 하는 일이 뭔지 잘 몰라도 사명을 통해 뭔가 혁신적인 일을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인프라스트럭처를 만드는 회사인데 인프라스트럭처의 코어가 되겠다는 사업 영역과 지향 가치를 사명에 잘 구현했다고 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