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작용 속출하는 아베 노믹스…엔화 구매력 50년 전으로 후퇴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주도하는 대국굴기(중국의 패권주의)의 자금줄이었다.’
최근 일본에서는 아베노믹스(아베 전 총리의 대규모 경기 부양책)의 부작용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아베가 시진핑의 전주였다’거나 ‘중국이 일본의 등골을 빼내 부자가 되고 있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중국의 급부상에 가장 곤란한 나라가 이웃 일본이다. 중국에 세계 2위 경제 대국의 지위를 내주면서 세계 시장을 속속 뺏기고 있는 데다 동북아시아 지역의 주도권도 넘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하는 데 종잣돈을 댄 인물이 바로 아베’라는 믿기 힘든 주장이 일본의 일부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는 것은 최근의 엔화 가치 하락과 관계가 있다. 아베노믹스를 통해 엔화 가치를 의도적으로 떨어뜨린 인물이 바로 아베 전 총리이기 때문이다.
MMT 이론 안 먹히는 일본
아베 전 총리는 2012년 12월 집권하자 아베노믹스에 착수했다. 일본 정부는 연간 수십조 엔씩 국채를 발행해 재정 확장 정책을 펼치고 일본은행은 이차원 금융 완화 정책을 실시해 물가 상승률이 2%에 도달할 때까지 무제한 자금을 풀었다.
아베 전 총리가 엔저를 유도한 것은 수출 기업의 실적을 개선함으로써 노동자의 임금과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개인 소득을 늘리면 소비도 증가해 일본이 지긋지긋한 20년의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무제한 양적 완화를 10년 가까이 실시했는 데도 일본은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그 사이 ‘잃어버린 20년’은 ‘잃어버린 30년’으로 바뀌었다.
아베노믹스는 현대통화이론(MMT)과 통한다. MMT는 ‘기축통화를 가진 나라의 정부는 돈을 무한정 찍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재정 적자가 아무리 커져도 국가 부도의 우려가 없다. 그러니 인플레이션이 심해지지 않는 수준에서는 걱정 말고 돈을 풀어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이론이다.
정부의 지출이 세수를 넘어서면 안 된다는 주류 경제학의 철칙과 반대되기 때문에 이단 취급을 받아 왔다. 그런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미국과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쇼크 당시 주요국들은 사실상의 MMT 정책을 썼고 경기 추락을 막는 효과를 거두면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현대통화이론이 먹히지 않는 나라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은행은 민간 금융회사에서 국채를 사들이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일본 정부의 재정 확장 정책을 지원한다. 일본은행이 국채를 사들이기 위해 찍어낸 엔화는 메가뱅크 등 민간 은행으로 흘러들어 간다.
원래라면 민간 은행들은 흘러들어 온 자금을 기업과 가계에 대출해 융통시켜야 한다. 하지만 일본 경제가 오랜 침체에 빠지면서 금융 시장의 가장 기본적인 이 원리가 작동하지 않게 됐다. 기업은 설비 투자를 하지 않고 가계는 주택 자금을 빌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아도는 자금을 일본에서 빌려줄 데가 없게 된 일본의 은행들이 눈을 돌린 곳은 국제 금융 시장이다. 일본의 대형 은행들은 뉴욕과 런던 등 해외 거점을 통해 자금을 운용한다. 일본에서 남는 엔화를 달러 자산에 투자한다. 일본으로선 대외 금융 채권과 해외에서 받을 돈이 늘어나는 셈이다.
일본은행이 돈 찍을수록 기쁜 중국
국제 금융회사들도 엔화를 반긴다. 조달 금리가 거의 제로이기 때문이다. 무이자에 가까운 금리로 엔화를 빌려 달러로 바꾸고 이를 국제 금융 시장에 융통한다. 지난 수년간 뉴욕과 런던 등 국제 금융 시장의 자금 공급 능력이 늘어나고 금리도 낮게 유지된 것은 일본 자금 덕분이라는 분석이 많다.
사실은 일본은행이 일본의 국내 경제를 띄우려고 찍어낸 돈이다. 지난 10여 년간 일본은행이 발행한 자금의 절반 이상이 국제 금융 시장으로 흘러들어 간 것으로 분석된다.
이 자금이 흘러들어 간 곳이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낮은 비용으로 조달한 자금(일본의 은행들이 싸게 공급한 자금)으로 군사 기술을 포함한 해외의 최첨단 기술을 획득하고 중국 중심의 거대 경제권 구상인 일대일로(一帶一路 : 내륙과 해상의 실크로드 경제 벨트) 투자 등에 사용했다.
일본의 민간 은행들은 중국에 대해 직접적으로 투·융자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국제 금융 시장이라는 중개 거점을 통해 중국의 대기업과 지방 정부는 달러채를 발행해 투자 자금을 마련하고 글로벌 큰손 투자가들은 싸게 조달한 자금을 홍콩 증시와 상하이 증시에 상장하는 중국 기업에 투자하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아베노믹스가 ‘정작 일본 경제를 활성화하는 효과는 없고 대국굴기를 외치는 중국 시진핑 정권만 기쁘게 할 뿐’이라거나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이 엔화를 찍어 중국의 대외 확장 정책에 자금을 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아베가 시진핑의 자금줄’이라는 이 역설적인 주장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일본은행의 자금 발행 잔액, 일본의 대외 금융 채권, 일본 민간 은행의 국제 융자, 중국의 대외 금융 채무는 2012년 12월부터 동일하게 증가했다.
추세가 일치하는 정도가 아니라 금액까지 거의 같다. 2021년 9월 말까지 일본은행 자금은 488조 엔(약 5071조원), 일본의 대외 금융 채권은 524조 엔 늘었다. 일본은행이 찍어낸 돈이 고스란히 해외로 흘러갔다는 의미다.
또 같은 기간 민간 은행의 국제 융자 규모가 206조 엔 증가하는 동안 중국의 대외 금융 채무(2021년 6월 말)는 232조 엔 늘었다. 일본의 민간 은행들이 국제 금융 시장으로 들고나간 돈 대부분이 중국에 흘러들어 갔다고 추정할 수 있는 수치다.
아베 전 총리가 주도한 인위적인 엔화 가치 하락은 구매력을 50년 전 수준으로 후퇴시키는 결과도 낳았다.
작년 11월 엔화의 실질실효환율(통화의 종합적인 실력을 나타내는 환율)은 67.79엔으로 1972년 6월의 67.49엔 이후 50년 만의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1972년은 닉슨 미국 대통령이 금과 달러의 교환 정지를 발표한 1971년 ‘닉슨 쇼크’ 이듬해다. 엔화가 변동 환율 체제로 이행해 달러당 환율이 300엔 전후까지 치솟았을 때(엔화 가치 하락)다.
11월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은 최고치였던 1995년 4월(150.85)의 절반 수준이다. 엔화의 구매력이 27년 만에 반 토막 나 1972년 수준으로 후퇴했다는 의미다.
화폐가 물가 수준과 동등한 구매력을 유지하려면 통화 가치도 따라서 올라야 한다. 하지만 아베의 일본은 거꾸로 ‘엔저(低)’를 유도했다. 몸이 부실해졌으면 생산성 향상 등 경제 펀더멘털(기초 체력)을 보강해야 하는데 강장제만 죽어라 마셔댄 셈이다.
아베 전 총리의 재임 기간 동안 아베노믹스는 다소 무리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일본의 장기 침체에 어느 정도 활력을 불어넣은 정책으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운동은 안 하고 박카스만 10년 가까이 마셔대면 탈이 나는 것처럼 일본 경제도 아베노믹스라는 강장제를 너무 오래 복용한 나머지 각종 부작용이 속출하는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