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가상 인간 도입 붐…‘정규 직원 채용’‘보조 수단’ 서로 다른 전략
“제 이름은 AI 은행원입니다. 혈액형은 AI형이고 MBTI는 ‘정의로운 사회 운동가’인 ENFJ예요. 어떤 업무를 도와드릴까요.”
기자가 2월 9일 오전 찾은 서울 여의도동 KB국민은행 인사이트점(IT 특화 점포)에 상주해 있는 AI 은행원이 한 말이다. 이날 인사이트 점포에선 가로 75cm, 세로 190cm의 55인치 디스플레이에 검은 정장에 노란색 넥타이를 맨 젊은 남성 모습의 AI 은행원이 등장했다. 인사를 하고 안내할 때 얼굴 표정과 손짓이 진짜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우선 은행 방문 고객의 상황을 가정해 보고 AI 은행원 서비스를 이용해 봤다. 디스플레이 오른쪽 상단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누르고 “적금 추천”이라고 말했더니 “고객님께 꼭 맞는 적극 상품을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상품을 확인하시려면 상품 이름을 눌러 주세요”라는 대답과 함께 화면에 적금 상품 안내 리스트가 나타났다. 안내 리스트에는 #직장인, #사회초년생, #사업자 등 큰 카테고리와 함께 직장인우대적금·KB마이핏적금·KB국민첫재테크적금 등 작은 카테고리가 차례로 나열돼 있었다. 직장인우대적금을 선택했더니 상품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화면에 나타났다.
방기석 KB국민은행 인사이트지점장은 “대면 상담 대기가 길 때 AI 은행원에게 설명을 듣고 통장·체크카드 재발급 등이 가능한 지능형 자동화 기기(STM)를 이용하면 창구 상담 없이도 단순 업무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일상 대화는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 AI 은행원은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등 금융 용어에 대한 설명과 건물 내 화장실과 주차장 안내는 물론 인근 맛집까지 추천해 줬다. 다만 “맛집을 검색해 줘”보다 “맛집을 추천해 줘”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종환 KB국민은행 AI혁신플랫폼부 팀장은 “800여 개의 금융 용어를 탑재했고 영업점 직원들도 참여해 1300여 개의 시나리오를 학습시켰다. 또 매주 금융 이슈를 업데이트해 AI 은행원이 학습할 수 있도록 반영하고 있다”며 “계속 보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방 지점장은 향후 개선해야 할 부분으로 AI 은행원 간의 역할과 공간의 분리를 꼽았다. 그는 “AI 은행원을 배치한 지 1주일이 됐는데 고객들이 개방된 공간에서 개인 정보를 말하기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며 “맞춤형 상품을 추천하기 위해선 개인 정보를 말해야 하는데 프라이빗한 공간을 따로 설치해 AI 은행원을 배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신한은행의 AI 은행원은 AI 컨시어지를 통해 접할 수 있었는데 높이 190cm, 65인치 디스플레이로 제작된 AI 컨시어지는 열화상 카메라로 체온을 측정하고 번호표를 전달하는 ‘안내원’ 역할을 했다. 검은색 양복에 푸른 넥타이를 맨 젊은 남성 모습의 AI 은행원이 고객이 원하는 업무를 물어보고 분석해 컨시어지 데스크(대면), 디지털 데스크(화상 상담 창구), 컨설팅 라운지, 기업 창구 등 목적에 맞는 상담 창구로 안내하는 것이다. 디지털 데스크는 젊은 여성 모습의 AI 은행원이 이체·인출 등 간단한 업무를 처리해 준다. 대출 등 복잡한 업무는 대형 모니터를 이용해 영업점 직원과 화상 대화를 통해 처리해 준다.
AI 은행원 간 역할이 분담돼 있고 프라이빗한 공간이 확보돼 있었지만 자연스러운 대화보다 단순한 업무형 대화에 그쳤다. 또 AI 컨시어지는 얼굴 인식을 통해 고객을 인식한 후 AI 은행원이 나타나 안내하기 때문에 처음 디지로그 점포를 방문했을 때는 어떤 키오스크가 AI 은행원이고 어디에 있는지 직관적으로 인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AI 은행원, 3사 3색
대부분 은행들이 신용 평가, 대출 심사, 리스크 모니터링, 챗봇 분야에서 AI를 활용하고 있다. 예컨대 대출 심사는 가공되지 않은 비정형 데이터를 이용해 신용 평점 산출, 금리 승인, 한도의 세부 조정 등이 필요한데 이때 AI가 유용하게 쓰인다. 최근에는 KB국민은행·신한은행·NH농협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이 AI를 활용한 디지털 상담 창구를 속속 도입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AI 은행원이다.
그런데 3사의 AI 은행원에 대한 지향점은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지난해 말 가장 먼저 AI 은행원을 선보인 신한은행은 AI 은행원을 ‘보조 수단’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AI 은행원은 간단하고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업무를 처리하고 현장 직원들은 전문적인 상담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목표다. 신한은행은 AI 은행원을 현재 서소문디지로그브랜치·한양대디지로그브랜치·여의도중앙지점·부산서면지점 등 4곳에 적용했고 점차 확대할 예정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AI 기업 마인즈랩과 협업을 통해 AI 은행원의 활용도를 고도화하는 중”이라며 “AI 은행원의 운영은 운영채널전략부가, 개발과 기획은 디지털전략부가 주도했다”고 말했다.
KB국민은행도 올해 1월 말부터 AI 기술을 활용한 키오스크를 여의도 인사이트점·여의도영업부·돈암동지점에 파일럿 형태로 도입했다. 이는 지난해 3월 선보인 KB국민은행 여의도 신관 AI 체험존의 상담사를 AI 은행원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으로, STM·현금자동입출금기(ATM)와 미리 작성 서비스 등 은행 업무가 가능한 주변기기 사용 방법 소개, KB국민은행 상품 소개, 업무별 필요 서류와 키오스크 설치 지점 위치 안내 등을 알려준다. 금융 상식, 날씨, 주변 시설 안내 등의 생활 서비스도 제공한다. AI 은행원은 음성 인식 기술을 바탕으로 고객과 대화하며 원하는 업무를 파악하고 KB국민은행이 자체 개발한 금융 특화 언어 모델 ‘KB-STA’를 통해 최적의 답을 도출한다는 설명이다.
KB국민은행은 AI 은행원을 영업점은 물론 모바일에서도 구현해 AI 금융 비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목표다. 마이데이터에도 활용할 방침이다.
NH농협은행은 2월 초 AI 은행원을 정규 직원으로 채용했다고 밝혔다. AI 은행원은 은행 내 근무하는 젊은 직원들의 얼굴을 합성해 만들었고 ‘정이든’과 ‘이로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이들에게 사번과 임용장을 주고 일반 행원처럼 직무를 부여해 관리할 계획이다. 현재 정이든·이로운 직원은 신규 직원 직무 교육을 마치고 NH농협은행 DT전략부 디지털R&D센터 소속으로 배치돼 AI 신사업 추진을 지원하는 업무를 배정받았다. 이 밖에 조직 내 체험관 방문객 응대 등 AI 은행원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어디든 투입될 준비를 마쳤다.
NH농협은행 관계자는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약 2개월간 삼성SDS와 협력해 AI 은행원을 개발했다”며 “AI 은행원은 내부 은행원을 보조해 업무에 도움이 되기 위해 기획됐다”고 말했다.
이어 “딥러닝 알고리즘을 통해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임직원 60여 명의 얼굴 이미지를 학습해 완전히 새로운 인물을 구현한 점이 실제 사람의 얼굴을 반영한 타행과의 차별점”이라고 덧붙였다.
빅테크의 공습, 위기감 고조
기존 은행권이 AI 은행원 등을 구축하며 디지털 전환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은 빅테크(대형 IT 기업)와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다만 은행들이 선보이고 있는 AI 은행원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티키타카보다 단순 은행 상품과 날씨 및 주변 환경을 소개하는 수준에 그친다.
반면 네이버와 카카오 등은 간편한 사용자 환경과 플랫폼 브랜드를 무기로 금융 시장에서 영토를 확대하고 있다. 특히 카카오뱅크는 점포 없이도 1799만 명(지난해 말 기준)의 고객을 확보했고 지난 1년간 255만 명의 고객이 증가해 은행권의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서정호 한국금융연구원 부원장은 “AI 기술 도입이 향후 국내 은행의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려면 우선 AI를 금융규제의 틀 안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내부관리체계를 정비해야 하고, 빅데이터 분석 및 알고리즘 개발 전문인력을 적극 확보하며 일관성 있는 AI 전략의 수립 및 집행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