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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인류는 어떻게 천연두와 콜레라를 이겨낼 수 있었을까?-1부 / 킹덤, 세균, 바이러스, 전염병 치료법, 코로나19, 수인성, 마마바이러스, 메리 월틀리 몬태규, 인두법, 우두법, 세계보건기구, 종두

인류는 어떻게 천연두와 콜레라를 이겨낼 수 있었을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한 시기에 전 세계인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K드라마 <킹덤>. 전 세계의 시청자들은 좀비로부터 생명을 구해내는 것과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 생명을 구하는 것을 동일시하며, 스크린 속의 <킹덤>과 스크린 바깥의 K방역을 함께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킹덤>에서 조선이라는 국가를 대표하는 세자 이창은 좀비를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역병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백성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신한다. 그를 돕는 의녀 서비는 역병으로서의 좀비를 치료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학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데에 전념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공포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전염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과 바이러스 역시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점에는 불가사의한 영역이었다. 전염병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근거가 불명확한 지식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오랜 세월 혼란을 겪어야 했다. 실제로 전염병의 원인과 백신의 발명, 효과적인 전염병 치료법이 실효성을 발휘하게 된 것은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 초반으로서, 불과 120여 년의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이는 수많은 학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편견과 오해의 장벽에 부딪히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연구를 거듭해온 결과일 것이다.
코로나19가 지금 이 순간에도 돌연변이를 계속하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현재. 오랜 세월 인류를 공포스럽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정복되었거나 거의 정복된 대표적인 전염병으로서 천연두와 콜레라에 대한 동서양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살아온 힘이 살아갈 힘이 된다는 김종삼 시인의 <어부>의 한 구절처럼 세균과 바이러스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인류가 지혜롭게 응전해왔는지에 대한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미래를 살아갈 힘과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킹덤>의 좀비는 역병으로서 극복하고 치료해야 할 대상이다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인간을 가장 오래 괴롭힌 천연두 바이러스를 극복하기까지

인류 역사상 최초의 백신은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천연두는 기원전 1만 년 경부터 인류를 괴롭혀온 전염병이었는데, 유럽 지역에서만 18세기 이전까지 매년 40만 명이 사망하였다. 감염자들 중 20~60%가 사망했으며, 살아남는다 해도 약 80%는 곰보가 되었다. 천연두를 일으키는 원인은 천연두바이러스(Variola Major)와 작은 마마바이러스(Variola Minor)인데, 당시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았지만 경험에 의한 예방법으로서 인두법을 고안하였다. 인두법은 천연두 환자의 두창 고름을 직접 활용하여 항체를 형성해 병을 미리 막는 것으로 15세기부터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서양에서는 인두법을 미신 정도로 여겨왔지만,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잉글랜드 대사 부인인 메리 워틀리 몬태규(Mary Wortley Montagu, 1689~1762)가 잉글랜드로 돌아가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천연두 환자의 고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인두법은 위험하여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1796년에 영국 출신의 의사였던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 1749~1823)가 안전한 예방법을 발견하게 되는데, 우연히 소젖을 짜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다. 이 여인은 자신이 예전에 우두(牛痘)1에 걸렸기 때문에 천연두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제너는 여기에 착안하여 종두법을 고안하였다.
더불어 '소(牛)'라는 뜻의 라틴어 ‘Vacca’에서 온 백신(Vaccine)이라는 표현도 만들어낸다. 백신 접종이 시행된 이후 천연두 감염자는 크게 감소하였으며, 세계보건기구(WHO)는 1979년에 천연두의 박멸을 선언하였다. 천연두는 인류가 최초로 박멸한 전염병이다.

조선에서는 1882년 지석영에 의해 종두법이 본격적으로 보급되었지만, 이전에도 정약용, 박제가, 이종인 등에 의해 인두법과 우두법이 도입되어 실생활에서 적용되었다. 정약용이 쓴 ‘종두설’에 의하면 1799년에 박제가가 중국에서 서책을 입수하여 정약용이 이를 『마과회통』에 실었으며, 1800년 박제가는 북경에만 있다는 ‘두종(痘種)’을 직접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박제가의 제자인 한의사 이종인은 두종을 가지고 가서 경성과 이북지방의 많은 선비들에게 접종하였다. 그러나 정조 승하 이후 정약용은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이종인은 신유사옥에 연루되었고 인두법도 단절된다. 정약용은 이를 크게 안타까워하였으나, 7년이 지난 1807년에 상주에 있는 의사가 종두를 접종하였는데 100여 명이 완치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단절된 줄만 알았던 종두법의 처방이 영남에서 다시 유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구지역의 양반이었던 서찬규의 『임재일기』에도 1849년 3월에 큰 아들에게 천연두를 예방접종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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