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M 손잡은 삼성의 파운드리 속도전...이재용 전략 통했다
광범위한 네트워크, 그리고 기술력
삼성전자가 미국 IBM의 차세대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 파운드리 계약을 수주했다. 실제로 IBM은 17일(현지시간) 차세대 서버용 CPU '파워(power) 10'을 공개하며 이를 삼성전자가 생산한다고 밝혔으며, 이는 극자외선(EUV) 기반 7나노 공정에 기반한 것으로 확인됐다.
EUV는 기본 반도체 미세공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광원이다. 초미세 공정의 기반이 된 EUV 기술은 기존 불화아르곤 (ArF)보다 파장의 길이가 짧은 EUV 광원을 사용해, 보다 세밀한 반도체 회로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EUV 노광장비는 이를 운용할 수 있는 장비다.
삼성전자가 IBM의 파운드리 물량을 수주한 것은, 대만 TSMC와 피 말리는 파운드리 경쟁에 나선 상황에서 얻은 쾌거라는 말이 나온다. 나아가 최근 미중 갈등의 중심에서 TSMC의 거침없는 진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삼성전자가 이를 이겨낼 수 있는 해법을 찾았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삼성전자와 협력하기로 한 AMD의 행보에도 집중하고 있다.
IBM과 맞손
현재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꿈의 7나노 공정을 가동하는 곳은 삼성전자와 TSMC가 유일하며, 최근 AMD 정도가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파운드리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와 TSMC의 직접적인 격돌이 벌어지는 양상이다.
IBM과의 협력이 큰 의미가 있는 이유다. 삼성전자는 IBM과 10년간 공동 연구개발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했으며, 이를 기점으로 2021년부터 IBM의 CPU를 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정확한 물량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인데다 삼성전자가 IBM의 물량을 소화해도 당장의 점유율 변화는 없겠으나, 이를 기점으로 다수의 팹리스와 만날 수 있는 의미있는 포트폴리오를 쌓았다는 점에서 삼성전자의 성과는 고무적이라는 평가다.
반도체 비전 2030
삼성전자의 반도체 비전 2030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에 133조원을 투자하는 한편 1만5000명의 전문인력 채용을 골자로 하는 삼성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에 이어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세계 시장을 석권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세계 반도체 회사 중 파운드리와 시스템 반도체 브랜드를 갖고 있는 유일한 회사로 활동하는 상황에서 파운드리를 미래 먹거리로 낙점했다.
삼성전자의 시스템 반도체 육성 전략의 핵심은 생태계 조성이다. 무엇보다 국내 팹리스와 함께 연합전선을 꾸리며 상생의 가치까지 추구하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지난해 4월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강화 방안'을 발표한 이후 팹리스, 디자인하우스 등 국내 중소 업체들과의 상생 협력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내 중소 팹리스 업체의 제품 개발 활동에 필수적인 MPW(Multi-Project Wafer)프로그램을 공정당 년 3~4회로 확대 운영하고, 8인치(200mm)뿐 아니라 12인치(300mm) 웨이퍼로 최첨단 공정까지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 중이다.
'통합 클라우드 설계 플랫폼(SAFE Cloud Design Platform, SAFE-CDP)'에 시선이 집중된다. 삼성전자와 클라우드 HPC(High Performance Computing) 플랫폼 업체인 리스케일(Rescale)이 함께 구축했으며 팹리스 고객들이 아이디어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즉시 칩 설계를 시작할 수 있도록 가상의 설계 환경을 제공하는 서비스다. 서버 확장에 대한 고객들의 투자 부담을 줄이고, 칩 설계와 검증 작업에 필요한 컴퓨팅 자원도 단계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설명이다.
올해 초 화성사업장 내 첫 번째 EUV(극자외선) 전용 'V1 라인' 준공을 통해 미세공정 존재감도 키웠다. V1 라인에서 초미세 EUV 공정 기반 7나노부터 혁신적인 GAA(Gate-All-Around) 구조를 적용한 3나노 이하 차세대 파운드리 제품을 주력으로 생산한다는 각오다. 삼성전자는 V1 라인 가동으로 2020년 말 기준 7나노 이하 제품의 생산 규모가 2019년 대비 약 3배 이상 확대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5월에는 경기도 평택캠퍼스에 파운드리 생산 시설을 확충해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중이다.
삼성전자는 총 30조원 이상의 자금이 투입되는 평택캠퍼스의 P3 공장도 내달 가동한다. P1은 2017년 하반기부터 가동이 시작됐고 P2는 올해 가동을 준비하는 상황이다. 상반기 14조7000억원의 투자를 단행한 삼성전자는 단일 규모로는 최대인 P3 공장을 준비하며 초기술 격차를 더욱 벌린다는 각오다.
P3는 2023년 말 가동될 것으로 보인다. EUV 공정을 통해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 모두를 생산하는 혼용팹이 될 전망이다. 최종 건축허가 면적은 70만㎡로 예상되며 삼성전자는 P4부터 P6 공장도 순차적으로 건설한다는 방침이다. P3에서 파운드리 물량을 소화할 것인지는 미지수지만, 일정정도 파운드리를 위한 다양한 가능성이 타진될 것은 확실시 된다.
삼성전자는 최근 7나노 EUV 반도체에 3차원 적층 패키지 기술인 X-Cube(eXtended-Cube)를 적용한 테스트칩 생산에도 성공했다. X-Cube는 전공정을 마친 반도체의 ‘원료’라 할 수 있는 복수의 웨이퍼(Wafer) 칩을 위로 얇게 쌓아 하나의 반도체로 만드는 기술이다.
이를 바탕으로 파운드리 경쟁력도 크게 키운다는 방침이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마켓전략팀 강문수 전무는 “EUV 장비가 적용된 첨단 공정에서도 TSV 기술을 안정적으로 구현해냈다”라면서 “삼성전자는 반도체 성능 한계 극복을 위한 기술을 지속 혁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에 다양한 투자를 단행하는 가운데 IBM과의 협력은 가뭄 속 단비가 될 전망이다. 현재 시장의 상황이 썩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스포드에 따르면 2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는 무려 51.5%의 점유율로 1위를 달리고 있으며, 삼성전자는 18.8%를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7나노 공정을 앞세워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주며 3위 글로벌파운드리, UMC, SMIC를 초기술 격차로 압도하는 중이다. 다만 삼성전자 입장에서 보면 TSMC와의 격차는 지나치게 크다. 최근에는 점점 그 격차가 벌어지는 중이다.
심지어 TSMC는 미중 갈등의 소용돌이속에서 영악한 정치적 판단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TSMC는 미중 무역전쟁 당시 미국의 압박에도 끝까지 화웨이와의 거래를 이어왔다. 그러나 최근 미국 공장 건설을 선언하며 기류가 묘하게 변해갔다. 이런 가운데 최근 홍콩 국가보안법 정국을 기점으로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자, 노골적으로 미국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중이다. 오랜 동맹 화웨이와는 아예 단절을 선언하기도 했다. 실제로 TSMC는 지난 7월 실적 발표회에서 “5월 이후 화웨이와 신규 거래를 하지 않고 있다”면서 “9월 14일 이후에는 납품이 없을 것”이라 말했다.
중국과의 단절에 나서는 TSMC는 두둑한 '보너스'를 받을 전망이다. 당장 글로벌 팹리스 업계의 핵심인 미국과의 밀착이 가능해지며 다수의 수주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인텔이 7나노 공정 생산을 포기한 가운데 그 물량을 TSMC에 몰아줄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는 이유다. 인텔의 경쟁사인 AMD의 물량을 TSMC가 소화하는 상황에서 인텔이 삼성전자에 물량을 집중시킬 것이라는 말이 나왔으나, 현 상황에서 인텔은 파운드리 파트너로 미국의 편에 선 TSMC를 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TSMC의 올 2분기 매출은 약 12조5000억원에 이르며 이는 전년 동기 대비 무려 28.9%나 올라간 수치다. 이런 가운데 앞으로 미국 반도체 기업들의 적극적인 수주를 받을 경우 화웨이와의 거래 차단에서 오는 피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말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오랜 파트너인 퀄컴의 분위기도 묘하다. 퀄컴이 삼성전자에 물량을 일부 배정한 것으로 알려진 3세대 5G 모뎀인 스냅드래곤 X60 5G 모뎀-RF 시스템(X60)을 TSMC에 대부분 몰아줬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퀄컴은 이를 두고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거나 부정하고 있으나, 업계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중이다.
네트워크, 그리고 기술력
삼성전자가 IBM의 파운드리 물량을 수주했으나, 당분간 TSMC의 독주체제는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당분간 미중 갈등의 아슬아슬한 신경전의 중심에서 TSMC는 팹리스 업계를 좌우하는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IBM과의 협력이 중요해진다. 삼성전자가 IBM의 파운드리 물량을 수주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다른 팹리스와의 협력도 타진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IBM의 물량이 판을 뒤엎을 한 방은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판을 흔들 수 있는 마중물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재용 부회장이다.
이 부회장은 2016년 로메티 당시 IBM 최고경영자(CEO)를 미국 아이다호주에서 열린 ‘앨런앤코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으며, 이번 파운드리 물량 수주에 있어서도 IBM과의 적극적인 협력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를 통해 신뢰를 확인한 두 사람이 이번 파운드리 계약에서도 전향적인 태도로 나섰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의 부족한 네트워크를, 이재용 부회장이 메워낸 셈이다.
이 부회장은 IBM 외에도 다양한 글로벌 기업들과도 강력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추후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삼성전자의 초기술 격차 본능이 더해지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의 판이 흥미진진하게 출렁이는 분위기다.
AMD 쇼크 오나
삼성전자가 IBM과의 파운드리 동맹을 맺으며 일각에서는 AMD와 삼성전자와의 관계에도 주목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AMD는 지난해 6월 초저전력·고성능 그래픽 설계자산(IP)에 관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은 바 있다. 그 연장선에서 업계는 AMD의 GPU를 탑재한 엑시노스가 등장할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삼성전자는 5G 모뎀칩을 비롯해 기지국, 단말기까지 이어지는 원스톱 플랫폼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대단위 플랫폼 전략을 가동하면 단기간에 의미있는 변화가 나올 수 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다만 두 회사의 협력 범위를 파운드리로 좁히면 더 재미있는 그림이 펼쳐진다. 인텔의 아성을 위협하는 AMD는 팹리스 업체며, 삼성전자와의 다양한 협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AMD는 TSMC와 100% 파운드리 계약을 맺고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삼성전자와 AMD가 협력을 해도 AMD가 파운드리 물량을 삼성전자에 밀어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통상적으로 팹리스와 파운드리의 계약은 라인 공정 등의 경직성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장기계약이기 때문이다.
다만 삼성전자가 IBM과의 협력으로 CPU 파운드리 측면에서 의미있는 행보를 보여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여기에 인텔이 7나노 공정 제작을 포기하며 물량을 어디에 몰아주느냐에 따라, AMD의 전략적 판단도 바뀔 수 있다는 주장도 조심스럽게 나오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