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중고 거래, 이젠 자판기로 안심하고 하세요”
김길준 파라바라 대표, 쇼핑몰·지하철역에 대형 자판기 설치, 누구나 상품 올리고 바로 구매도 가능해
긴 장마로 서울 전역이 축축했던 8월 11일 용산역에 있는 ‘아이파크몰’ 7층 식당가에 들어서자 낯선 모습의 자판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하철역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 자판기보다 덩치가 약 두 배 정도 컸는데 판매하는 물건들도 색달랐다. 가방·모자·면도기·장난감 등 여러 중고 상품들이 밝은 조명 아래 진열돼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을 지나가던 몇몇 쇼핑객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선 채 자판기를 들여다본 뒤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설립된 스타트업 파라바라가 운영하는 비대면 중고 거래 자판기 ‘파라박스’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김길준 파라바라 대표는 “어떻게 하면 더욱 안심하고 편하게 중고 거래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중고 거래 전용 자판기인 파라박스를 내놓게 됐다”고 설명했다.
중고 게임기 구매하다 아이디어 떠올라
스타트업 대표들의 창업 계기를 들어보면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겪었던 불편함을 ‘사업 아이템’으로 발전시켜 도전장을 낸 경우가 많다. 김 대표도 마찬가지다. 군 제대 후 중고 제품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좋지 않은 기억’이 학업을 뒤로한 채 그를 창업 전선에 뛰어들게 한 계기로 작용했다. 1995년생인 그는 현재 연세대(기계공학과 2학년)를 휴학하고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 초 군대를 제대하고 중고 게임기를 구매한 적이 있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중고 거래가 가진 문제점을 직접 체감했어요. 일단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판매자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부터 조심스러웠고 택배로 물건을 받을 때 ‘상대방이 사기를 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갖게 하더라고요.”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 그는 판매자와 직접 만나 물건을 거래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후에도 끝날 줄만 알았던 ‘걱정’은 계속 이어졌다.
“판매자와 지하철역 인근에서 만나 거래하기로 했는데 약속 장소에 가 보니 인적이 드문 곳이더라고요. ‘이상한 사람이 나오면 어쩌지’라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거래를 무사히 마치고 게임기를 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문득 사업 아이템이 하나 떠올랐다고 했다.
“중고 거래를 하며 겪었던 여러 문제들을 해소한 서비스를 선보이면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들에게 얘기했더니 모두 ‘한 번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한 친구는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함께 창업하는 큰 결단을 내렸어요. 이후 친구 셋이 모여 고민하다가 마침내 지금의 파라박스라는 사업 모델을 내놓게 됐습니다.”
그의 말처럼 파라박스는 온라인 중고 거래가 가지고 있던 사기의 위험, 직거래 과정에서의 범죄 등을 최소화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파라박스에서 중고 물품 판매를 원하는 이들은 자판기 안에 휴대전화 번호와 대략적인 상품 설명, 받고 싶은 가격을 입력하고 상품을 넣어 두기만 하면 된다.
판매자가 악의를 갖고 하자가 있는 물건을 넣을 수도 있는 만큼 내부적인 ‘안전핀’도 마련했다. 반드시 파라바라 애플리케이션(앱)을 설치해 개인 정보를 입력하고 휴대전화 본인 인증까지 거쳐야만 판매 자격을 부여한다.
SNS에서 큰 화제 불러일으켜
중고 물품을 구매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먹는 것처럼 마음에 드는 제품을 선택한 뒤 현금 또는 카드 결제를 하고 물건을 꺼내 가면 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생길 수 있는 사기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구매자가 결제한 돈을 3일 뒤 판매자에게 전달하는 내부 방침을 세우기도 했다.
“구매자가 결제한 돈은 3일 동안 파라바라에서 갖고 있어요. 그 기간 동안 아무 문제가 없으면 최종적으로 판매자에게 전달해 줍니다. 만약 구매자가 3일 안에 우리한테 모조품 또는 고장 난 제품을 구매했다고 알릴 경우 돈은 환불해 주고 물품은 회수합니다. 회수한 물품은 기존 판매자에게 다시 돌려주는 방식이죠. 사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 같은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팔리지 않는 물건들이 계속 자판기의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적용한 ‘운용의 묘’도 돋보인다. 자판기에 넣은 뒤 6일이 지나도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7일째부터 매일 10%씩 판매자가 제시한 가격을 떨어뜨린다.
김 대표는 “이에 따라 자연히 대부분의 물건은 결국 새 주인을 찾거나 다시 판매자의 품에 돌아가는 구조를 구축했다”고 말했다.
수익 모델은 물건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수료다. 2만원 이하 제품은 2000원, 2만원 이상인 제품은 가격의 10%를 수수료로 책정했다.
“수수료가 비싼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파라박스를 설치한 만큼 온라인에서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물건을 홍보하며 팔 수 있어요. 실제로 판매된 물건들을 보면 온라인에서 1만원에 팔릴 법한 것들이 파라박스에서는 더 비싸게 거래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의 행보만 놓고 보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만하다. 창업한 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지만 용산역 아이파크몰 외에도 서울의 5개 쇼핑몰과 지하철역 등에서 파라박스를 운영하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 온라인 및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파라박스를 설치해 달라는 문의 전화가 늘고 있다.
김 대표는 수익성을 제고하기 위해 향후 파라박스에서 중소기업들이 만든 제품을 판매할 계획도 갖고 있다. 진열대 중 일부를 쇼윈도처럼 예쁘게 꾸며 기업들을 고객으로 유치하고 소비자들이 물건을 구매하도록 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미 국내의 한 중소 화장품 회사와 이와 관련한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파라박스라는 새로운 서비스 모델을 통해 누구나 쉽고 안전하게 중고 거래를 할 수 있는 시장 문화를 만들어 가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중고차를 제외한 중고 거래 시장 규모는 약 20조원으로 추산됩니다. 사기 또는 판매자와의 대면 접촉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중고 거래 이용을 꺼리는 이들이 많은데 이런 것들이 잘 해결된다면 시장 규모는 더욱 가파르게 커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파라바라가 이런 시장 문화를 선도하는 중심에 서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이자 바람입니다.”
돋보기
“차기철 인바디 대표는 파라바라의 ‘숨은 조력자’”
파라바라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차기철 인바디 대표가 ‘숨은 조력자’ 역할을 한 것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인바디는 차 대표가 설립한 ‘체성분 분석기’ 세계 1위 기업이다.
사연은 이렇다. 김길준 파라바라 대표는 군대에 입대하기 전 학교(연세대)에서 차 대표의 창업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차 대표 역시 김 대표와 마찬가지로 연세대 기계공학과 출신이다.
당시 차 대표는 후배들에게 “창업할 의지가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다”고 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는데 군 제대 후 창업을 결심한 김 대표의 머릿속에 문득 차 대표가 했던 이 말이 떠올랐다.
그는 차 대표에게 자신의 사업 보고서를 e메일로 보낸 뒤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차 대표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김 대표에게 서울 강남에 있는 ‘인바디 벤처센터’의 사무실 공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줬고 현재도 이용하고 있다. 임차료 없이 전기요금 일부만 내며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다고 김 대표는 설명했다.
파라바라라는 기업명도 차 대표의 조언을 받아 만들어진 이름이다. 김 대표는 “원래 기업명을 내가 판다는 뜻을 가진 ‘아이셀(ISELL)’로 정했는데 ‘별로 와 닿지 않는다’는 차 대표의 지적을 받고 고민하다가 결국 파라바라로 정하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