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골판지)’을 구하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만큼 ‘쇼티지(공급 부족)’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주요 제지 기업들이 회원사로 소속된 단체인 한국제지연합회 관계자에게 업계 상황을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택배 상자를 생산하는 골판지 생산 업체들을 바라보는 시장의 기대치가 더 높아지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현장에서는 박스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골판지가 ‘품귀 현상’을 겪는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택배 박스 수요가 계속 급증하는 추세다. 이른바 ‘공급자 우위’의 시장이 됐다.
자연히 박스를 만드는 원재료인 ‘골판지 원지’ 가격도 최근 치솟고 있다. 탄탄한 수요에 원가 인상까지 더해지면서 관련 기업들은 큰 폭의 수익성 개선이 가능해진 것으로 분석된다. 증권가 일각에서는 올해 골판지 생산 업체들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관측한다.
아세아제지 등 5개 업체 수직 계열화 수혜
하나의 택배 상자가 완성되는 과정은 대략 이렇다. 우선 신문지와 같은 종이 폐지를 재가공해 ‘골판지 원지’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활용해 ‘골판지 원단’이 제작되고 최종적으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누런색 택배 상자가 완성된다.
과거엔 골판지 원지와 원단 그리고 상자를 생산하는 기업들이 각각 존재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활발한 인수·합병(M&A)으로 원지부터 상자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수직 계열화’ 구조를 갖춘 기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현재 아세아제지·신대양제지·태림포장·삼보판지(대림제지)·한국수출포장 등 5개 업체가 여기에 해당한다. 택배 물량 증가의 수혜를 한껏 누릴 수 있는 구조를 갖춘 셈이다.
특히 올해 들어 이 기업들이 기대를 모으는 배경은 박스의 원재료인 골판지 원지 가격이 심상치 않아서다.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된 지난해에도 택배 물량이 증가하면서 한국의 골판지 생산량이 크게 늘었지만 정작 기업들의 실적은 기대에 못 미쳤다. 골판지 원지 가격의 하락 때문이었다.
한국제지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기업들의 골판지 원지 생산량은 전년보다 약 9% 증가한 580만 톤에 달했다. 시장 자체는 호황이었지만 기업들의 실적을 살펴보면 오히려 역성장한 곳들이 많았다.
골판지 원지 가격은 업체별로 제각각이기 때문에 정확한 가격 통계를 내기가 어려운데 관련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골판지 원지 가격은 업체들의 과잉 경쟁으로 전년보다 떨어지는 추세였다. 2018년 톤당 40만원이 넘었던 원지 가격은 30만원 후반대로 가격이 낮아졌다. 수요가 늘긴 했지만 골판지 생산량이 워낙 많아 기업 간 가격 경쟁이 일어나다 보니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지난해 10월을 기점으로 시장 흐름이 완전히 달라졌다. 신대양제지의 계열사 대양제지에서 발생한 화재가 원인으로 작용했다.
대양제지는 한국 골판지 원지 생산량의 7% 정도를 담당해 온 기업이다. 이런 곳에서 불이 나자 골판지 원지가 순식간에 공급 부족 현상을 겪기에 이른 것이다.
수치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골판지 원지는 매년 10~20만 톤 정도의 재고가 쌓여 왔다. 대양제지가 매년 생산한 골판지 원지는 약 40만 톤이다. 즉 대양제지의 생산 중단으로 매년 최소 20만 톤의 골판지 원지가 부족하게 된 셈이다.
"수급 정상화까지 오랜 시간 걸릴 것"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현재 골판지 원지의 톤당 가격은 대략 55만원 이상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작년과 비교할 때 10만원 이상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판지 원지 수요는 끊이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계속해 온라인 쇼핑 규모가 커지고 있고 택배 물량도 계속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골판지 원지의 가격 급등은 관련 기업들의 실적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홍종모 유화증권 애널리스트는 “지난해 지지부진했던 골판지 기업들의 실적을 보면 4분기 들어 큰 폭으로 상승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양제지의 화재 이후 골판지 원지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더욱이 현재 일어나는 공급 부족 현상이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여 포장 제지 기업들의 실적 전망을 더욱 밝게 한다.
현재 대양제지는 원지 생산 시설 복구 여부가 아직 불투명한 상황이다. 원지를 생산하는 초지기는 대당 가격이 1500억원에 육박하는 고가이기 때문이다. 화재로 불탄 대양제지의 초지기는 총 두 대로, 당장 3000억원의 돈이 필요한 만큼 투자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만약 복구하기로 결정하더라도 예전처럼 정상화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초지기는 핀란드 등 유럽 지역에 있는 기업들에서 주로 생산한다. 크기가 어마어마해 주로 해상 운송을 통해 한국에 들여온다. 과거 사례를 볼 때 보통 초지기의 발주부터 한국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6개월에서 1년 정도였다.
최근 유럽 지역이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정상적인 공장 가동이 어려운 데다 해상 운송까지 지연되는 상황을 고려할 때 대양제지가 초지기를 발주하더라도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최장 2년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이런 특성 때문에 다른 업체들의 증설도 쉽지 않다.
상황이 이렇자 정부가 나서 해외 원지 수입을 추진하고 나섰고 신문지 용지를 뽑아내던 업체들도 설비를 전환해 골판지 원지를 생산하고 있지만 공급량 상승량은 소규모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 애널리스트는 “온라인 쇼핑 시장의 성장과 함께 환경 규제 강화로 플라스틱 포장재의 자리까지 골판지 상자가 대신하고 있는 만큼 수요는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 업계의 상황을 보면 생산량이 부족해 장기간 공급 부족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골판지 회사 중 시장 성장의 수혜를 보는 구조를 갖춘 기업들은 올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최근 거세게 불고 있는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바람에 힘입어 주목받는 제지 업체들도 있다. 친환경 포장재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한솔제지·무림페이퍼 등 인쇄 용지 업체들이 주인공이다. 지속되는 인쇄 용지 수요 감소로 어려움에 빠졌던 이 기업들은 종이를 활용한 차세대 친환경 패키징 소재 개발을 통해 다시 한 번 시장의 뜨거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한솔제지의 행보가 돋보인다. 종이 유연 포장재인 ‘프로테고’를 개발하고 상용화한 상태다. 종이 포장재는 산소·수분·냄새 차단 기능이 떨어져 기존 플라스틱이나 알루미늄 포장재를 대체하지 못했다.
원지에 친환경 코팅을 한 프로테고는 이런 단점을 보완하는 데 성공한 친환경 제품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마스크 포장지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며 주목받고 있다. ‘테라바스’도 빼놓을 수 없다. 기존 종이 용기는 플라스틱 계열 성분인 폴리에틸렌을 코팅해 만들어 재활용하기가 어렵다.
한솔제지에 따르면 테라바스는 자체 개발한 수용성 코팅액을 사용한 종이 용기라 자연 분해가 가능하고 재활용하기가 용이하다. 또 최근에는 롯데제과의 제품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카카오 열매 부산물을 활용해 친환경 종이 포장재인 ‘카카오 판지’를 개발하기도 했다.
무림페이퍼도 친환경 제품 전용 브랜드 ‘네오포레’를 앞세워 친환경 시장을 공략 중이다. 종이빨대와 종이컵에 이어 최근엔 택배용 비닐 완충재를 대체할 수 있는 종이 완충재를 선보이기도 했다. 플라스틱을 대체하겠다는 목표 아래 목재와 플라스틱을 결합한 친환경 ‘우드플라스틱(WPC)’ 옷걸이를 상용화하기도 했다.